[5월 9일]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마법같은 곳이다 (삼성혈, 서귀포자연휴양림)
[5월 9일]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마법같은 곳이다
오늘은 월정리 바다와 헤어지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밥을 먹고 민박집 정리하고 짐을 꾸렸는데, 오전 한나절이 후다닥 지나가 버렸다. 한집 살림을 다 챙겨다니려니 짐 꾸리는 게 정말 큰 일이다. 어떻게 하면 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제주도에 오기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이것도 빼고 저것도 뺐지만, 결국 차 트렁크는 물론이고 뒷좌석까지 짐들로 빼곡히 들어차 버렸다. 캠핑을 시작하면 여러 장비를 사들이다가 마지막에는 차를 바꾼다더니, 그 말이 충분히 수긍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건 분명 장비의 과잉이다. 캠핑을 많이 다녀보진 않았으나,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인상 깊은 텐트는 어느 손꼽히는 고가의 텐트들이 아니라 정말 단출하고 보잘 것 없는 텐트였다. 작년 가을 나의 첫 번째 캠핑, 나름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주어 마련한 장비를 처음 펼쳐 보인 날, 그 텐트는 허영과 욕심으로 가득한 나에게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사은품으로나 받았을 법한 텐트와 낡은 돗자리. 집에서 쓰던 휴대용 가스버너와 냄비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어느 부부는 고가의 장비들로 무장한 세상 모든 캠퍼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없이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도 캠핑을 하는구나. 저것이 바로 캠핑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단출한 캠핑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닮은 진짜 캠핑의 모습이 아닐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는 제주시에 있는 삼성혈에 갔다. 그곳에서 친구, 준호네 가족을 만났다. 엊그제 우연히 통화하다 그 친구네 가족도 제주도에 내려와 있는 걸 알았고 오늘 잠깐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세상 좁다는 말을 실감했고, 정말 제주도를 많이 찾는구나 싶었다.
삼성혈(三姓穴)은 소위 '삼성신화(三姓神話)'라고 알려진 신화의 발상지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명의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 이들은 사냥을 하면서 살았는데, 하루는 나무함이 바닷가에 떠밀려 왔다. 열어보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명 송아지, 망아지, 오곡 종자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이들과 혼인을 했고 각자 기름진 땅에서 오곡의 씨를 뿌리며 풍요롭게 살았다. 여기에서 세 신인이 솟아난 곳이 바로 제주시 이도동의 삼성혈이다.
저 안에 신인이 솟았다는 구멍이 있다.
여느 신화가 다 그렇겠지만, 이 역시 당시 권력자가 조상을 신성화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 신화가 애초에는 무당들의 서사무가로 전해지던 탐라국 건국의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일개 세 가문(三姓)의 유교적 제의로 쪼그라들었단 점이다. 이는 유교를 앞세워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 정부가 탐라국의 토속세력과 문화를 척결하는 와중에 일부 가문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삼성혈 입구에는 당시 토속세력 척결에 앞장섰던 지방관들의 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혈에서 처음으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게 한 이수동 목사, 당 오백과 절 오백에 불을 질렀다는 이형상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단일민족국가라고 자부하는 우리에게도 힘 있는 자들에게 짓밟힌 변방의 역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부터는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야영한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한라산 1300 고지에 있으며 전체 면적이 76만 평에 이른다. 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 차를 타고 숲 속을 한참 동안 달려야 비로소야영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편백 숲으로 둘러싸인 제3야영장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빼곡히 하늘로 솟은 편백과 텅 빈 야영데크가 만난 곳,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마법같은 곳이다.
한참 텐트를 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조금 더 아래쪽에 놀이터가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 그쪽으로 텐트를 옮기기로 했다. 짐을 옮기는 게 조금 번거롭지만, 그래도 놀이터가 있는 게 더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텐트, 접었다 다시 치기엔 뭔가 억울한 것 같아 그냥 들어서 옮기기로 했다. 결국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동욱이랑 동호까지 텐트 한쪽씩 잡고 '텐트이동작전'에 돌입했다. 자기들도 뭔가 돕는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영차영차 정말 열심이다. 기특하군. 이번에 제주도 오면서 거실형 텐트를 돔 텐트로 바꿨는데, 잘한 거 같다. 휴대도 간편하고 거창한 느낌도 없고.
편백 숲 놀이터.
어둠이 내리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작은 랜턴 하나 밝혀 숲길로 나섰다. 하늘을 올려다본 동욱이가 "별 참 많다. 별천지다"라고 말하니 동호가 "맞다 맞다", "맞다 맞다"라고 외친다. 애들이 오늘 밤 저 별들 사이에서 신 나게 뛰어노는 꿈을 꾸면 좋겠다. 그날 밤 우리 텐트에는 검정치마의 <International Love Song>이 끊임없이 흘렀다.
I really really wanna be with you
I'm so very lonely without you
I can hardly breathe when you are away
without you I might sleep away all day
애들이 자면, 우리는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듯 지도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