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방귀대장 조동욱과 <방귀 며느리>
아이들의 변신은 무죄다. 안경 하나 걸치면 아빠가 되고, 망토 하나 둘러쓰면 슈퍼맨이 된다. 오늘도 동호가 아침 일찍부터 엄마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엄마다. 엄마다.”라며 역할 놀이에 흠뻑 빠졌다.
대개 세 살쯤 되면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역할을 인식하면서 자신에게 친숙한 사람부터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언어능력이 점점 발달하면서 상대방과 협의해 더 복잡한 줄거리의 가상 상황을 만들어 역할 놀이를 즐긴다. 아이들은 이를 통해 자기중심적인 사고 깨고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며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물을 다른 사물로 표상하고 상징하며 창조적인 상상력을 키워간다.
그런데 문제는 아빠의 호응이다.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의 놀이에 흠뻑 빠지기엔 아빠는 늘 할 일이 많고 딴생각도 많다. 그리고 피곤하기까지. 그래서 아빠는 건성으로 대충 하고, 아이들의 욕구는 좌절되기가 일쑤다. 미안하고 안타깝다. 지금이야 못 놀아서 안달이지만, 다 크고 나면 언제 또 이렇게 살갑게 놀 수 있겠나 싶어 짠하다. 그러니 힘내서 놀 수밖에. “엄마, 맘마 주세요.”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아기처럼 동호 꽁무니를 열심히 쫓아다녀 본다.
점심은 애월읍에 있는 보리밥 집에서 해결했다. 특별한 메뉴가 있는 맛집은 아니지만, 집에서 먹는 밥 같아 좋았다. 동욱이는 보리밥을 한 공기 다 비우고 온종일 방귀를 뽕뽕 터트렸다. 방귀대장 조동욱이다.
제주도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지역이라 물을 가둬두지 못해 논농사가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집에 큰일이 있을 때에만 쌀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그만큼 흰 쌀밥이 귀했는데, 이름도 ‘고은 밥’이란 뜻으로 ‘곤밥’이라 불렀다. 그 유명한 <방귀 며느리>가 제주 지역의 설화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애월읍에는 유명한 보리빵집도 있다. 시골 읍내의 작고 허름한 가게인데, 성수기에는 오전 한나절에 빵이 다 팔린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가 컸다. 그런데 애걔, 옛날 엄마가 해주시던 술빵이다. 어릴 적엔 정말 맛이 없었는데. 근데 신기한 게 어른이 돼서 지금 먹어보니 참 맛있다. 아무 맛도 없는 빵이 맛있다니, 나도 나이를 먹은 거다.
보리밥에 보리빵까지, 장 활동이 활발해진 건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애월읍에서 조금 떨어진 귀덕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신호가 온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동욱이가 큰 소리로 “아빠, 똥 싸고 왔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순간 조용하던 카페의 모든 시선이 엉거주춤해 있는 나에게 쏠렸다. 아, 이런 관심은 좀 …….
애월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협재해변과 금능해변을 만날 수 있다. 협재해변이 크고 잘 알려진 데 비해 바로 그 옆에 있는 금능해변은 비교적 아담하고 한적하다. 우리는 금능해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는 돗자리를 펴자마자 30분만 잔다며 자리에 눕는다. 애들은 모래놀이를 시작했고,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저 멀리 비양도와 바다를 바라본다. 하늘이 흐려 바다도 흐리멍덩하다.
금능해변에서 바라 본 비양도. 저 깃발은 뭘까.
성수기가 아니라서 매점이 문을 닫았고 우리는 그 앞에 진을 쳤다.
쫓는 조동욱과 도망치는 조동호
저녁은 한림읍에 있는 중국음식점에 먹으려고 했는데, 가보니 문을 열지 않았다. 낭패다. 피곤하고 배고픈 아이들이 이제 곧 짜증을 부릴 텐데 말이다.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폭풍 검색에 나섰지만, 여의찮다. 초조한 검색을 얼마나 했을까, 드디어 괜찮아 보이는 식당 하나를 찾았다. 금능포구 안쪽에 있는 작은 횟집인데, 관광객들이 오는 식당이라기보다 동네 아저씨들이 모이는 아지트처럼 느껴졌다. 이런 느낌, 좋다. 물론 음식도 맛있었다. 새콤하고 꼬들꼬들한 물회 맛이 일품이었다. 애들도 깔끔하고 담백한 밑반찬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했다. 이런 게 바로 여행에서 만나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겠지.
배불리 먹고 해가 뉘엿이 기운 포구를 거닐었다. 동욱이가 엄마랑 손을 잡고 먼저 저만치 걸어갔다. 그 뒤를 동호가 따랐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혼자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본다. 어라, 이 녀석 봐라. 제법 폼 좀 잡네. 어른이나 애들이나 해 질 녘 바다를 느낄 줄 아는 건 똑같나 보다. 왜 안 그렇겠어. 이렇게 아름다운데. 느낌이 없는 게 이상하지. 동호도 느낄 건 다 느낄 줄 아는 어엿한 녀석인 거다. 고맙다, 동호야. 벌써 이 바다만큼 자라줘서.
그물 밟지말라고 그렇게 소리쳤거늘 막무가내다.
동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돌아오는 길, 애들은 어김없이 곯아떨어졌다. 어두워진 숲길을 헤드라이트 밝히고 가는데, 노루 한 마리가 후다닥 뛰어갔다. 나도 놀랐지만, 노루가 더 놀랐을 거다. 애들이 봤음 신기하다 했을 텐데. 그렇게 아쉬운 하루가 또 지나고 있었다.
'제주유랑가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12일] ‘못살포’에서 만난 태양 같은 바다 (모슬포항, 산방산, 화순금모래해변) (0) | 2012.12.10 |
---|---|
[5월 11일] 자투리의 진가가 널리 발휘되는 날이 오기를 (저지예술인문화마을, 설록차박물관, 자동차박물관) (0) | 2012.11.30 |
[5월 9일]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마법같은 곳이다 (삼성혈, 서귀포자연휴양림) (0) | 2012.11.13 |
[5월 8일] 달이 머무는 바다 (월정리) (0) | 2012.08.20 |
[5월 7일] 오늘 바다는 어제보다 눈부시다 (김녕성세기해변) (0) | 2012.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