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2. 1. 18:24

[5월 14일] 세상과 만나는 길, 올레


밤새 내린 비는 아침이 돼서야 그쳤다. 오늘은 다시 서귀포시로 돌아가 미리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할 예정이다.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에 숙소 두 곳을 미리 예약했는데, 여행이 반환점을 도는 오늘과 내일 그 첫 번째 숙소에 머무르게 된다. 보름 동안 고생한 우리를 위한 일종의 선물이랄까.

 

짐을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민박집을 막 나서는 순간, 달팽이 두 마리가 우리를 막아섰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달팽이는 느릿느릿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렸을 땐 비 온 다음 날이면 달팽이며 지렁이며 참 많았는데, 흙과 풀이 사라지고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놈들이 되어 버렸다. 암튼 좋은 징조인 듯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우리가 갈 숙소 이름이 바로 '달팽이'였기 때문이다. 뭔가 착착 들어맞는 느낌이다.

 

금녕해변을 떠나 해안도로를 달려 다시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저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무겁게 내려앉은 비구름이 산방산을 가뒀고 해변에는 더욱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음산하고 쓸쓸했다.

 

잔뜩 흐린 제주 바다

 

점심은 지난번에 문을 닫아서 못 먹었던 밀냉면과 수육으로 해결했다. 이름난 식당이라 평일인데도 정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았다. 물론 맛도 좋다. 담백한 밀냉면과 쫄깃한 수육이 제각각 훌륭했지만, 그 관계가 금상첨화다. 밀냉면은 수육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고 수육은 밀냉면의 허허한 맛을 잡아줬다. 아무튼, 한가지 메뉴로 승부하는 이런 집이 좋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서귀포향토오일장에 들렀다. 제주도에는 민속오일장이 곳곳에서 열린다. 여기 서귀포향토오일장을 비롯해 제주민속오일장, 한림민속오일장, 대정오일시장, 중문향토오일시장, 표선오일시장, 성산오일시장, 세화오일시장 등. 각각의 시장마다 들어서는 날짜도 다르고 특색도 달라 골라 보는 재미랄까, 뭐 그런 게 있다. 그래서 날짜만 맞으면 대형마트 안 가고 재래시장과 오일장만 이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대로 잘 안 된다. 냉장고가 없어 그때그때 조금씩 장을 봐야 해서 5일장 일정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시장에 가면 인심도 좋고 뭐 그럴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고. 카드도 안 되고 바가지 쓰는 건 아닌지 괜한 의심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같은 뜨내기가 마치 단골손님처럼 대우받길 원하는 건 일종의 환상에서 비롯한 지나친 기대가 아닐지 싶다. 좋은 관계라는 것도 결국은 쌓이고 싸여 형성되기 마련이니까. 재래시장에서 소비되는 돈은 대형마트와 달리 모두 지역 주민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작은 불편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장도 보고 넉넉해진 마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는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게스트하우스 비용을 입금하고 확인 전화를 하지 않아 예약이 안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마침 예약 취소된 다른 방이 있어 그곳에서 묵을 수 있었다. 애초 우리가 예약한 방보다는 작은 방이었지만, 옆에 방 2개가 모두 취소되어 집 한 채를 독차지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전화위복이겠지.

 

게스트하우스는 작은 방 3개와 거실, 주방이 있는 아담한 집이다. 거실에는 진공관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클래식 음악이 가득했고 작은 인형들과 아기자기한 장식 소품들이 방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었다. 동욱이랑 동호는 얼른 방 하나를 꿰차고 앉아 인형들과 장식물들을 장난감 삼아 놀기 시작했다. 저러다 뭐라도 깨지거나 고장 나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지만, 둘이 어울려 재미있게 노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달팽이게스트하우스 옆집

 

 

저리 노니 얼마나 좋아!

 

애들 키우는 게 힘드니까, 처음 하나일 땐 잠자는 모습이 예뻤고, 둘이 돼서는 부모 안 찾고 저렇게 어울려 노는 게 그렇게 예쁠 수 없다. 처음에 둘째를 갖고 둘이서 잘 놀겠지 했는데 웬걸, 저렇게 둘이 어울려 노는 건 정말 최근 들어서야 아주 가끔 볼 수 있는 일이다. 어쩌다 같은 방에서 둘이 놀아도 가만히 살펴보면 제각각 따로 놀 뿐이다. 세 살 무렵까지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할 만큼 사고력이 발달하지 못하는데, 이때서야 점점 타인의 감정에도 대처할 수 있게 되고 도덕성이 자리 잡게 된다. 애들끼리의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해방감에 후련하지만, 또 한편으론 품 안의 자식이라고 벌써 섭섭한 마음이다.

 

저녁 먹기 전에는 마을 산책에 나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면 마을의 큰길까지 조그만 돌담길이 이어진다. 이게 바로 진짜 올레다. 올레는 집에서 큰길까지 이르는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어다. 거친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건데, 이게 관광 콘텐츠가 되어 지금의 제주올레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듯 올레는 나에게 돌아가는 길이자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 길은 작고 구부러진 길이다. 지금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제주올레가 대형화된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기보다 세상과 내가 만나는 길로 끝까지 남기를 바란다.

 

저렇게 뛰어 노는 게 즐거운데, 도시에서 어떻게 사나 모르겠다

 

 

나무를 품은 돌담

 

 

기발한 아이디어다. 일단 편하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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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2. 12. 10. 17:20

[5월 12일] ‘못살포’에서 만난 태양 같은 바다


아침에 텐트 안에서 우유를 쏟았다. 동욱이는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며 "그러니까 조금만 따랐어야지!"라며 타박을 준다. 이럴 때 보면 꼭 애늙은이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날을 텐트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고약한 냄새라도 베면 고달픈 일이다. 그래서 얼른 이불을 닦아내고 빨랫줄에 묶어 널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내가 설거지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울상이 되어 있었다. 휴양림 관리인이 당장 치우라고, 텐트를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큰소리치고 갔단다. 그런데 내가 없어 무서웠다고. 나는 부랴부랴 짐을 정리하고 관리사무소로 가서 따져 물었다. 조금 전에 다녀간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강제 철거 운운하며 협박하는 거냐고 말이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연박이 안 되니 9시 전에는 짐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전해 들은 바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로 협박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강하게 따졌다.

 

사실 내가 이렇게 강하게 항의한 건 조금 오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얻은 일종의 비결(?)랄까. 아내는 늘 공정한 척 심판하거나 무심하게 논평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내는 어떤 상황에서건 우선 자기 마음에 공감해주고 자기편이 되어주길 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내가 어떤 경우에도 자기편이란 걸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만약 여기 운영 원칙이 그래서 그런 거래, 저쪽은 많은 사람을 대하는 거니 우리가 이해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 대처했다간 남은 여행이 아주 고달팠을 것이다. 물론 아내가 겁에 질릴 정도였으니,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일은 분명했다. 그냥 아주 조금, 쪼금 그랬다는 거다. 내 마음 알지, 여보야? ^^;;

 

오늘은 제주도 서쪽 고산리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남쪽 서귀포까지 달리는 일정이다. 고산리에 도착하니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라는 차귀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배낚시가 유명하고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한치 3마리를 사서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얼마 가지 않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적지인 고산리선사유적지가 있다기에 잠깐 들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유적지가 있다는 표지판만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일과리를 지나 모슬포항에 도착하니 토요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갖가지 먹거리는 물론이고 노래자랑까지 열리는 장터였다. 그런데 전통장터라기 보다 약간 이벤트 행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점심으로 우럭조림을 먹었다. 역시 항구 안쪽에 자리 잡은 허름한 식당이었는데 맛이 최고다.

 

 

 

 

 

모슬포항에서. 잘 뛴다, 우리 동호!

 

점심을 먹고 다시 해안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와! 언덕을 하나 넘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아마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면 이 멋진 광경을 놓쳤을 것이 분명하다!) 난데없이 불쑥 솟아오른 산방산과 확 트인 바다, 그 사이에서 굽이굽이 감도는 검은 해안과 쉴새 없이 넘실대는 하얀 파도가 한데 어울려 장관을 연출한다. 월정리 바다가 세상을 감싸는 달을 닮은 바다라면, 이곳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킬 거센 태양과 같은 바다였다.

 

바다와 땅이 이렇게 오묘하고 멋드러지게 만나는 곳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세기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모슬포는 '못살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한 곳도 바로 이 지역이다. 기괴하기로 유명한 추사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곳의 혹독한 날씨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내가 제주도에서 본 바다 중에서 넘버 쓰리 안에 드는 멋진 곳이다.

 

 

산방산 아래 작은 카페에서 애플파이를 먹고 있는 동욱이랑 동호. 역시 먹는 건 동호 중심이다. ^^::

 

산방산을 지나면 화순금모래해변이 나온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변인데, 오늘은 이곳에서 모래 놀이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분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맨살을 따갑게 때릴 정도다. 결국, 모래 놀이는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철수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놀다가 산방산 근처로 다시 돌아가 밀면과 수육이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모래 놀이가 무산되면서 30분을 더 달려 중문색달해변까지 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식당은 저녁 6시까지만 영업을 하는데,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결국, 또다시 폭풍검색에 나섰고 우리는 제주향토음식전문점이라고 검색된 한 식당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영 꽝이다. 식당은 엄청 크고 으리으리한데 값만 비싸고 맛은 별로였다. 역시 관광지의 이런 큰 식당보다는 약간 외지고 허름해도 현지인들이 더 많이 식당이 더 맛있는 법이다.

 

텐트로 돌아와 애들 눕히고 아내와 제주막거리를 한 잔씩 마셨다. 원래 술은 잘 못하는데, 애들 재우고 껌껌한 텐트 안에서 작은 렌턴 하나 밝히고 마시는 술 한 잔은 정말 달짝지근하다. 얼근한 취기가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피로도 적당하게 풀어준다. 그나저나 오늘은 동욱이가 아침부터 모래 놀이 가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아쉽다. 내일은 기필코 모래 놀이를 하고 말 테다, 다짐하며 동욱이를 꼭 끌어안고 눈을 붙였다.

Posted by altern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