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를 쫓아 (김녕 해변, 월정리~평대리~세화리~하도리, 어느 이름 없는 해변)
갑자기 쨍! 햇볕이 내리쬔다. 타프스크린이 없는 우리 텐트로는 속수무책이다.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다. 오늘 하루 얼마나 더우려고 아침부터 이러는지. 이렇게 더운 날엔 뭐니 뭐니 해도 물놀이가 최고인 법, 우리는 서둘러 김녕 해변으로 향했다.
다시 찾은 김녕 해변은 변함없이 고왔다. 발그스레한 홍조를 띤 새색시 같다. 그런데 오늘 김녕서포구에서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올레20코스가 개통되는 모양이다. 제주의 숨겨진 보물 같았던 월정리, 평대리, 세화리 해변에 이제 곧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슬프다. 이제는 다시 못 볼 나만의 월정리, 평대리, 세화리 바다를 가슴에 담으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세화리를 지나 구좌읍 하도리에 닿으면 제주해녀박물관이 나온다. 제주해녀박물관이 여기에 세워진 것은 이곳이 일제강점기 해녀들의 항일운동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보통 항일운동이라고 하면 3∙1 운동을 일으켰다는 민족대표 33인과 같이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주체로 등장하기 마련인데, 해녀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다고 하니 신기하고 새롭다. 교과서의 역사가 왕들의 역사인 것처럼 나 역시 민중의 저항을 몇몇 지도자만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럽고 죄스럽다.
제주도가 다 그렇지만, 특히 이곳 세화와 하도, 성산, 그리고 바다 건너 우도는 자연환경이 척박하기로 유명하다. 밭은 자갈과 모래뿐이며 하늘엔 바람뿐이다. '동촌 여자들이 서촌 여자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난다'는 말이 보여주듯 이곳 여성들의 삶은 제주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억척스러웠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는 고달픈 민중의 삶의 숨겨져 있다.
당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해녀는 1만 7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집회와 시위 횟수도 200여 건,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봉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대규모로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발행했던 것은 부당한 해산물 수매가격 때문이었다. 해녀어업조합이 뇌물을 준 일본인 상인에게 턱없이 늦은 가격으로 해산물을 사들일 수 있도록 특혜를 줬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해녀들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결국 이들의 요구는 대부분 관철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녀들이 강력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불턱의 힘이 컸다. 제주 해안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불을 쬐면서 쉬던 곳이다. 그런데 불턱은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해녀들은 그곳에서 서로의 삶과 아픔을 나눴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며 토론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불턱에서 여인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모의하고 단결을 도모할 것이란 사실을.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하도 해변이다. 거의 다 온 것 같은 느낌에 천천히 차를 몰며 주위를 살피는데, 불현듯이 길가로 난 작은 숲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뭘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차를 세우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마치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를 쫓아 토끼 굴로 들어갔던 앨리스처럼 말이다. 우리도 차를 타고 가는 게 슬슬 지겨워진 것이 분명했다.
저기 깡총깡총 뛰어가는 토끼 좀 봐
그랬더니 세상에! 이렇게 멋진 해변이 숨겨져 있다니! 우도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작은 해변에는 금빛 모래와 푸른 바다가 햇빛을 머금고 반작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서 놀라고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작은 해변 하나를 완전히 독차지한 채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물이 이렇게 맑을 수 있지?
저 하늘은 또 어떻고
춤추는 가족
날아라, 신발 우주선
까르르~~~
꿈속에서 깨어 나와 야영장으로 돌아오니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이제 모구리야영장과도 작별할 시간이 되었구나 싶었다. 애들 씻기고 동호 기저귀 입히느라 씨름하는데 동욱이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 아빠 옷을 잡고 늘어진다. 동호도 재미를 붙었는지 까르르 웃으며 기저귀 안 입겠다며 발버둥을 친다. 몇 번을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짜증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결국 "아이 몰라 나도 안 해!"라며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랬더니 애들도 쪼르륵 따라나오더니 씩 웃으며 아빠 뒤만 쫓아다닌다. 아휴,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아빠를 들어다 놨다 하는구나.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기저귀를 차든지 말든지, 그냥 재미나게 놀기나 하자구나!
모구리야영장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제주유랑가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28일] 월정리 바닷가를 거니는 두 여인 (월정리) (0) | 2013.07.26 |
---|---|
[5월 27일] 마네킹 가슴을 훔친 아이 (김녕 해변) (0) | 2013.07.10 |
[5월 25일] 상상의 섬, 이어도의 비밀 (김영갑갤러리, 세화오일장) (0) | 2013.05.27 |
[5월 24일]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만나다 (비자림) (0) | 2013.05.25 |
[5월 23일]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슛!" (표선해비치해변) (0) | 201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