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4. 26. 01:05

[5월 22일] 동호가 저 바다를 책으로 배우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몰라 (우도)


일출을 보겠다는 어젯밤 다짐은 결국 의욕에 지나지 않았다. 우도가 제주도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오르는 해를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침에 눈을 뜬 건 이미 해가 바다 위로 한참 떠오른 후였다. 맨날 뜨는 해가 여기라고 뭐 다른 게 있겠느냐며 애써 위안할 뿐이다.


그런데 동호가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열고 "바다!"라고 외친다. 아직도 외계어가 많은 동호지만, 이제 바다만큼은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다. 동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바다는 아침 해를 흠씬 머금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동호가 저 바다를 책으로 배운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얼른 아침을 먹고 바닷가로 나간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지만, 오랜만에 바다로 놀이를 나온 동욱이는 신이 났다. 바닷물에 발도 담그고 버려진 페트병으로 모래 장난도 하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호가 아빠 품을 파고든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동호를 안고 카페로 들어갔다.



해변가에서 동욱이랑 동호, 엄마


동욱이는 달리기를 좋아해



카페에서 동호를 안고 멍하니 있는데 불현듯이 조금 못마땅한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찬란한 바다를 두고 고작 카페에서 잠든 애나 안고 있다니. 일분일초라도 아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텐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밖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분주하게 움직이며 호호하며 웃고 떠들며 사진도 찍고 사라진다. 아, 처량한 내 신세여.


그런데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자니,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더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쩌면 바다에서 향정신성 물질이 마구 쏟아져 나와 나의 중추신경을 이완해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힐링인가. 편안하고 좋다.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격으로 우도에서 진짜 바다를 만난 것 같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이다.



저 많은 포스트잇 좀 봐. 저 사람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점심은 보말칼국수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비양도로 향했다. 제주도에는 두 개의 비양도가 있다. 서쪽 협재 해변에서 보이는 비양도와 이곳 비양도가 그것이다. 서쪽 비양도는 지는 해를 올린다는 뜻에서 '떠오를 양(揚)'을, 이곳 비양도는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 해서 ‘볕 양(陽)’을 쓴다. 흔히 이곳 비양도를 '섬 중의 섬'이라고 하는데, 사실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그런 느낌은 별로다.


비양도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드나드는 길목답게 바람이 강했다. 하지만 넘실대는 바다와 푸른 초원 위로 지천으로 핀 들꽃이 그림 같은 곳이다. 



동호와 아빠, 설정 샷. ㅋㅋ


정말 근사하지.


회오리바람 일으키며 아빠에게 달려오는 동호


돈짓당. 이곳에서 바다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영등할망은 2월 초하루 제주도로 들어와 보름 간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농경지에는 곡식을 뿌려 주고 갯가 연변에는 전복, 소라 등이 많이 자랄 수 있도록 해초 씨를 뿌려 준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고 하며 영등할망을 위한 영등굿을 벌인다. 영등할망은 요새로 치면 꽃샘추위인 셈인데, 이게 오죽 심했으면 굿까지 벌였겠나 싶다. 세상의 모든 풍요의 여신이 그렇듯, 영등할망 역시 척박한 자연환경과 그에 순응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시 30분, 다시 배를 타고 성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장을 본 뒤, 모구리야영장으로 출발했다. 모구리야영장은 성산읍에서 서쪽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30분 정도 차로 달려야 나온다. 불과 30분의 거리지만, 바다의 정취는 온데간데없고 산과 들판의 대륙적인 광경만 눈앞에 가드하다.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 야누스의 제주도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모구리야영장은 모구리오름 서쪽 자락에 있다. 마치 새끼를 안고 있는 어미 개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모구악(母狗岳), 모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와, 야영장이 정말 환상이다. 넓은 초원과 어우러진 영지는 물론, 탁 트인 시선 앞으로 펼쳐진 크고 작은 오름들과 이국적인 느낌의 풍력발전기까지. 게다가 시설은 또 어떻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마치 '캠핑천국'에 온 듯한 느낌이다.



모구리 우리집



이러 저리 둘러보며 어디에 텐트를 칠까 궁리하다, 외지고 전망도 좋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것 자리에 짐을 풀었다. 차를 야영장 안으로 끌고 올 수 없어 짐을 옮기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이 정도야 뭐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는다. 


후다닥 저녁도 먹고 야영장 산책도 하고 나니, 아이들은 8시가 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이곳 모구리야영장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잠든 아이들의 입가에도 빙그레한 미소가 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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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2. 6. 28. 14:59

 

김녕해변의 새로운 배이스캠프

 

[5월 6일] 오늘 밤은 폭낭이 될 수밖에

 

관음사야영장 5일째, 오늘 베이스캠프를 옮기기로 했다. 애초 우리가 찜을 해둔 야영장은 관음사야영장, 서귀포자연휴양림, 돈내코야영장, 모구리야영장, 이렇게 네 곳이다. 대략 대엿새 주기로 베이스캠프를 옮기고 때때로 민박과 바닷가 야영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김녕성세기해변에서 하루 지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제주시에 사는 아내의 선배 집에 잠깐 들렀다. 서울에 살다가 몇 해 전 제주도로 내려와 정착한 집이다. 제주 이민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거침없이 제주이민>이란 책에 ‘불꽃 아빠 뽀뇨의 프리랜서 일기’란 꼭지로 실리기도 했다. 온 가족이 거지꼴을 하고 찾아가 밥도 얻어먹으랴, 여행정보도 얻으랴,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으나 꽤 부러웠다. 아이들 키우면서 언제나 마음 한구석엔 시골로 내려갈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아이들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면서 키우긴 정말 싫다. 그럼에도 섣불리 시골로 내려가지 못하는 건 도시생활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독특하게 전세가 거의 없고 ‘년세’란 게 있다. 부동산 매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집은 말 그대로 사는(living) 집이다. 싫든 좋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집이다. 자기 집이 있고 버는 만큼 쓴다. 그래서 남자는 대개 삶이 치열하지 않다. 술 먹고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즐긴다. 윷놀이에 한 판에 천만 원씩 돈이 걸린다. 물론 여자는 다르다. 물질이면 물질, 밭일이면 밭일, 일 년 365일 쉴 날이 없다.

 

김녕성세기해변은 제주시에서 1132번 일주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야 한다. 중간에 ‘조천-함덕 해안도로’로 빠지면 함덕서우봉해변이 나온다. 잘 알려진 해수욕장이지만, 관광지 분위기가 너무 강하다. 마치 태국의 어딘가에 있을 휴양지 같은 느낌이다.

 

반면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김녕성세기해변은 다르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사장, 해안도로를 따라 서 있는 풍력 발전기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고 고요하다. 게다가 바다 바로 옆으로 넓은 잔디밭의 야영장이 있다. 아직 정식으로 개장을 안 해 물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지만, 여유로운 바닷가 야영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천혜의 장소였다.

 

 

김녕바다, 아름답다.

 

바다를 보고 있는 우리 집

 

 

황송하게도 온통 꽃이다.

 

 

텐트 설치하고 바닷가 한번 갔다 오니 금방 해가 저문다. 사람들이 물러난 바닷가의 밤은 바람이 주인이다. 허락 없이 영역을 침범한 우리를 혼내기라도 하듯 밤새 우리 텐트를 흔들어댄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우리 집이 날아가는 건 아닌지, 무서워서 잠을 이룰 수 없다. 이런 상황은 꿈꿨던 야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하여튼 겁은 많아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훌륭한 조명이 된다.

 

 

제주도 바람은 무섭고 섬뜩하다. 따뜻한 날씨에도 변화무쌍한 바람으로 사람들의 삶은 척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아직도 바람신인 영등신을 모신다. 음력 2월 초하루에 영등환영제가, 2월 14일에 영등송별제가 열린다. 영등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왔는지, 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등등에 따라 한 해 운세도 달라진다고 한다. 미신일 뿐이지만, 바람으로 하룻밤 고생하니 절로 수긍이 간다.

 

폭낭도 바람이 만들어낸다. 폭낭은 바람을 타는 나무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엎드리는 풀잎처럼 폭낭도 바람으로 방향에 따라 제 몸의 방향을 바꾼다. 자연은 자연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 이 바람을 어쩔 수 없는 나로서도 오늘 밤만큼은 폭낭이 될 수밖에 없다.

 

 

제주도 어디선가 찍어 둔 폭낭


Posted by altern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