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7. 10. 16:48

[5월 27일] 마네킹 가슴을 훔친 아이 (김녕 해변)


아침 7시, 오늘도 어김없이 햇볕이 쨍! 내리쬔다. 아침 일찍 일어난 동욱이 동호가 어제부터 빨래집게를 가지고 논다. 나도 어렸을 때 빨래집게를 잘 가지고 놀았는데, 마당이 없어지고 빨래건조대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빨래집게도 사라졌다. 물고 물리는 단순한 규칙으로 비행기가 되고 로봇이 되는 빨래집게는 오늘날 레고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놀잇감이다. "아빠도 어렸을 때 이거 가지고 놀았대."라며 놀이에 열중하는 동욱이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은 모구리야영장에서 철수하는 날이다. 짐을 싸는 것도 일이지만, 야영장과 주차장이 멀어 그 많은 짐을 손수 옮기는 것도 일이다. 몇 번을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며 짐을 옮기는데, 아뿔싸! 자동차 열쇠가 트렁크 속으로 딸려 들어가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결국, 보험회사 긴급출동 차량을 부르고 나서야 겨우 모구리야영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구리야영장에서 나와 김녕 해변으로 향하는 중 잠깐 마트에 들렀다. 동호를 카트에 태우고 이것저것 물건을 살피고 있는데, 주위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돌아보니, 동호가 카트 위에 서서 수영복 속으로 손을 넣어 마네킹 가슴을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동호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는데, 어찌나 민망하고 당황스럽던지 진땀이 삐질삐질 났다. 동호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니, 녀석은 천연스레 배시시 웃기만 할 뿐이다.


둘째라 그런지 몰라도 동호는 24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 찌찌를 찾는다. 그것도 굉장히 자주. 게다가 동호는 신체적 발육이 빨라 언뜻 보기에는 30개월도 더 돼 보인다. 그런 녀석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엄마 찌지를 찾으니, 당황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오늘 같은 사건이 터진 것. 동호 말고 백주에 마트에 전시된 마네킹 가슴을 훔친 자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마침 최근 논란이 된 타임지 표지 사진이 떠올랐다. 3살 된 남자아이가 의자에 서서 26살 엄마 젖을 물고 있는 사진이다. 표지 제목은 "Are you mom enough?" 아이가 어릴 때 부모와 맺은 정서적, 육체적 유대감이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애착 이론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포대기육아법'이라는 우리의 전통적인 육아 방식이 관심을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면 마네킹 가슴에 손을 댄 동호를 탓할 일은 아니지 싶다. 여전히 엄마의 찌찌에 목말라 하는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랑과 애착이 아닐지 모르겠다.


오늘 다시 김녕 해변을 찾는다. 내일부터는 제주도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사흘 동안 민박을 할 예정이라, 사실상 오늘이 제주도에서 야영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야영을 어디에서 할지 여러 번 고민했으나, 매번 먼저 떠오르는 곳은 김녕 해변이었다. 아름다운 바다를 코앞에 두고 야생화가 만발한 푸른 잔디밭에서 뒹굴 수 있으니 다른 곳이 생각나겠는가. 게다가 애들이 좋아하는 모래놀이를 위한 모래사장도 곱고 넓다.



김녕 해변 우리집



김녕 해변에 도착하니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이미 여러 개의 텐트가 차려져 있다. 그렇지. 이렇게 좋은 곳을 세상 사람들이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야영장 한가운데 쳐진 텐트가 처음부터 신경을 거스른다. 남자 두 명이 캠핑하는데,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비메탈 음악을 무도회장처럼 크게 틀어 놓은 것이다. 결국 그 옆의 텐트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다행히 음악 볼륨은 조금 줄어들었다.



동욱이 그림



오후에는 동욱이 동호가 해변에서 놀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동호는 동욱이랑 놀고 싶고, 동욱이는 아빠랑 놀고 싶고. 그래서 삐친 동호가 동욱이에게 모래를 집어 던지고, 화난 동욱이도 동호에게 모래를 던지고. 동호가 먼저 울고, 동호가 우니 동욱이도 덩달아 울고. 애들은 싸우는 것도 일이다. 


그래도 별걱정 없는 건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다시 웃고 노니 말이다. 나도 분명 어렸을 땐 저랬을 텐데, 언제 이렇게 미운 마음을 흘려 버리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 되어 버렸을까. 함덕 해변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니 붉은 노을에 온 바다가 타들어 간다. 나도 저렇게 태양과 바람과 구름에 모든 것을 내주는 바다처럼 살고 싶다.



해질 무렵 바다



밤 바다.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의 바다는 절대 풀 수 없는 고차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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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6. 12. 12:46

[5월 26일]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를 쫓아 (김녕 해변, 월정리~평대리~세화리~하도리, 어느 이름 없는 해변) 


갑자기 쨍! 햇볕이 내리쬔다. 타프스크린이 없는 우리 텐트로는 속수무책이다.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다. 오늘 하루 얼마나 더우려고 아침부터 이러는지. 이렇게 더운 날엔 뭐니 뭐니 해도 물놀이가 최고인 법, 우리는 서둘러 김녕 해변으로 향했다. 


다시 찾은 김녕 해변은 변함없이 고왔다. 발그스레한 홍조를 띤 새색시 같다. 그런데 오늘 김녕서포구에서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올레20코스가 개통되는 모양이다. 제주의 숨겨진 보물 같았던 월정리, 평대리, 세화리 해변에 이제 곧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슬프다. 이제는 다시 못 볼 나만의 월정리, 평대리, 세화리 바다를 가슴에 담으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세화리를 지나 구좌읍 하도리에 닿으면 제주해녀박물관이 나온다. 제주해녀박물관이 여기에 세워진 것은 이곳이 일제강점기 해녀들의 항일운동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보통 항일운동이라고 하면 31 운동을 일으켰다는 민족대표 33인과 같이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주체로 등장하기 마련인데, 해녀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다고 하니 신기하고 새롭다. 교과서의 역사가 왕들의 역사인 것처럼 나 역시 민중의 저항을 몇몇 지도자만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럽고 죄스럽다.


제주도가 다 그렇지만, 특히 이곳 세화와 하도, 성산, 그리고 바다 건너 우도는 자연환경이 척박하기로 유명하다. 밭은 자갈과 모래뿐이며 하늘엔 바람뿐이다. '동촌 여자들이 서촌 여자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난다'는 말이 보여주듯 이곳 여성들의 삶은 제주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억척스러웠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는 고달픈 민중의 삶의 숨겨져 있다.


당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해녀는 1만 7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집회와 시위 횟수도 200여 건,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봉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대규모로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발행했던 것은 부당한 해산물 수매가격 때문이었다. 해녀어업조합이 뇌물을 준 일본인 상인에게 턱없이 늦은 가격으로 해산물을 사들일 수 있도록 특혜를 줬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해녀들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결국 이들의 요구는 대부분 관철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녀들이 강력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불턱의 힘이 컸다. 제주 해안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불을 쬐면서 쉬던 곳이다. 그런데 불턱은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해녀들은 그곳에서 서로의 삶과 아픔을 나눴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며 토론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불턱에서 여인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모의하고 단결을 도모할 것이란 사실을.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하도 해변이다. 거의 다 온 것 같은 느낌에 천천히 차를 몰며 주위를 살피는데, 불현듯이 길가로 난 작은 숲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뭘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차를 세우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마치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를 쫓아 토끼 굴로 들어갔던 앨리스처럼 말이다. 우리도 차를 타고 가는 게 슬슬 지겨워진 것이 분명했다.



저기 깡총깡총 뛰어가는 토끼 좀 봐



그랬더니 세상에! 이렇게 멋진 해변이 숨겨져 있다니! 우도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작은 해변에는 금빛 모래와 푸른 바다가 햇빛을 머금고 반작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서 놀라고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작은 해변 하나를 완전히 독차지한 채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물이 이렇게 맑을 수 있지?



저 하늘은 또 어떻고



춤추는 가족



날아라, 신발 우주선



까르르~~~



꿈속에서 깨어 나와 야영장으로 돌아오니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이제 모구리야영장과도 작별할 시간이 되었구나 싶었다. 애들 씻기고 동호 기저귀 입히느라 씨름하는데 동욱이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 아빠 옷을 잡고 늘어진다. 동호도 재미를 붙었는지 까르르 웃으며 기저귀 안 입겠다며 발버둥을 친다. 몇 번을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짜증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결국 "아이 몰라 나도 안 해!"라며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랬더니 애들도 쪼르륵 따라나오더니 씩 웃으며 아빠 뒤만 쫓아다닌다. 아휴,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아빠를 들어다 놨다 하는구나.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기저귀를 차든지  말든지, 그냥 재미나게 놀기나 하자구나!



모구리야영장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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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4. 26. 01:05

[5월 22일] 동호가 저 바다를 책으로 배우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몰라 (우도)


일출을 보겠다는 어젯밤 다짐은 결국 의욕에 지나지 않았다. 우도가 제주도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오르는 해를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침에 눈을 뜬 건 이미 해가 바다 위로 한참 떠오른 후였다. 맨날 뜨는 해가 여기라고 뭐 다른 게 있겠느냐며 애써 위안할 뿐이다.


그런데 동호가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열고 "바다!"라고 외친다. 아직도 외계어가 많은 동호지만, 이제 바다만큼은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다. 동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바다는 아침 해를 흠씬 머금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동호가 저 바다를 책으로 배운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얼른 아침을 먹고 바닷가로 나간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지만, 오랜만에 바다로 놀이를 나온 동욱이는 신이 났다. 바닷물에 발도 담그고 버려진 페트병으로 모래 장난도 하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호가 아빠 품을 파고든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동호를 안고 카페로 들어갔다.



해변가에서 동욱이랑 동호, 엄마


동욱이는 달리기를 좋아해



카페에서 동호를 안고 멍하니 있는데 불현듯이 조금 못마땅한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찬란한 바다를 두고 고작 카페에서 잠든 애나 안고 있다니. 일분일초라도 아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텐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밖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분주하게 움직이며 호호하며 웃고 떠들며 사진도 찍고 사라진다. 아, 처량한 내 신세여.


그런데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자니,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더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쩌면 바다에서 향정신성 물질이 마구 쏟아져 나와 나의 중추신경을 이완해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힐링인가. 편안하고 좋다.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격으로 우도에서 진짜 바다를 만난 것 같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이다.



저 많은 포스트잇 좀 봐. 저 사람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점심은 보말칼국수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비양도로 향했다. 제주도에는 두 개의 비양도가 있다. 서쪽 협재 해변에서 보이는 비양도와 이곳 비양도가 그것이다. 서쪽 비양도는 지는 해를 올린다는 뜻에서 '떠오를 양(揚)'을, 이곳 비양도는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 해서 ‘볕 양(陽)’을 쓴다. 흔히 이곳 비양도를 '섬 중의 섬'이라고 하는데, 사실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그런 느낌은 별로다.


비양도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드나드는 길목답게 바람이 강했다. 하지만 넘실대는 바다와 푸른 초원 위로 지천으로 핀 들꽃이 그림 같은 곳이다. 



동호와 아빠, 설정 샷. ㅋㅋ


정말 근사하지.


회오리바람 일으키며 아빠에게 달려오는 동호


돈짓당. 이곳에서 바다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영등할망은 2월 초하루 제주도로 들어와 보름 간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농경지에는 곡식을 뿌려 주고 갯가 연변에는 전복, 소라 등이 많이 자랄 수 있도록 해초 씨를 뿌려 준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고 하며 영등할망을 위한 영등굿을 벌인다. 영등할망은 요새로 치면 꽃샘추위인 셈인데, 이게 오죽 심했으면 굿까지 벌였겠나 싶다. 세상의 모든 풍요의 여신이 그렇듯, 영등할망 역시 척박한 자연환경과 그에 순응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시 30분, 다시 배를 타고 성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장을 본 뒤, 모구리야영장으로 출발했다. 모구리야영장은 성산읍에서 서쪽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30분 정도 차로 달려야 나온다. 불과 30분의 거리지만, 바다의 정취는 온데간데없고 산과 들판의 대륙적인 광경만 눈앞에 가드하다.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 야누스의 제주도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모구리야영장은 모구리오름 서쪽 자락에 있다. 마치 새끼를 안고 있는 어미 개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모구악(母狗岳), 모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와, 야영장이 정말 환상이다. 넓은 초원과 어우러진 영지는 물론, 탁 트인 시선 앞으로 펼쳐진 크고 작은 오름들과 이국적인 느낌의 풍력발전기까지. 게다가 시설은 또 어떻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마치 '캠핑천국'에 온 듯한 느낌이다.



모구리 우리집



이러 저리 둘러보며 어디에 텐트를 칠까 궁리하다, 외지고 전망도 좋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것 자리에 짐을 풀었다. 차를 야영장 안으로 끌고 올 수 없어 짐을 옮기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이 정도야 뭐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는다. 


후다닥 저녁도 먹고 야영장 산책도 하고 나니, 아이들은 8시가 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이곳 모구리야영장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잠든 아이들의 입가에도 빙그레한 미소가 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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