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마네킹 가슴을 훔친 아이 (김녕 해변)
아침 7시, 오늘도 어김없이 햇볕이 쨍! 내리쬔다. 아침 일찍 일어난 동욱이 동호가 어제부터 빨래집게를 가지고 논다. 나도 어렸을 때 빨래집게를 잘 가지고 놀았는데, 마당이 없어지고 빨래건조대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빨래집게도 사라졌다. 물고 물리는 단순한 규칙으로 비행기가 되고 로봇이 되는 빨래집게는 오늘날 레고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놀잇감이다. "아빠도 어렸을 때 이거 가지고 놀았대."라며 놀이에 열중하는 동욱이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은 모구리야영장에서 철수하는 날이다. 짐을 싸는 것도 일이지만, 야영장과 주차장이 멀어 그 많은 짐을 손수 옮기는 것도 일이다. 몇 번을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며 짐을 옮기는데, 아뿔싸! 자동차 열쇠가 트렁크 속으로 딸려 들어가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결국, 보험회사 긴급출동 차량을 부르고 나서야 겨우 모구리야영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구리야영장에서 나와 김녕 해변으로 향하는 중 잠깐 마트에 들렀다. 동호를 카트에 태우고 이것저것 물건을 살피고 있는데, 주위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돌아보니, 동호가 카트 위에 서서 수영복 속으로 손을 넣어 마네킹 가슴을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동호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는데, 어찌나 민망하고 당황스럽던지 진땀이 삐질삐질 났다. 동호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니, 녀석은 천연스레 배시시 웃기만 할 뿐이다.
둘째라 그런지 몰라도 동호는 24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 찌찌를 찾는다. 그것도 굉장히 자주. 게다가 동호는 신체적 발육이 빨라 언뜻 보기에는 30개월도 더 돼 보인다. 그런 녀석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엄마 찌지를 찾으니, 당황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오늘 같은 사건이 터진 것. 동호 말고 백주에 마트에 전시된 마네킹 가슴을 훔친 자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마침 최근 논란이 된 타임지 표지 사진이 떠올랐다. 3살 된 남자아이가 의자에 서서 26살 엄마 젖을 물고 있는 사진이다. 표지 제목은 "Are you mom enough?" 아이가 어릴 때 부모와 맺은 정서적, 육체적 유대감이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애착 이론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포대기육아법'이라는 우리의 전통적인 육아 방식이 관심을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면 마네킹 가슴에 손을 댄 동호를 탓할 일은 아니지 싶다. 여전히 엄마의 찌찌에 목말라 하는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랑과 애착이 아닐지 모르겠다.
오늘 다시 김녕 해변을 찾는다. 내일부터는 제주도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사흘 동안 민박을 할 예정이라, 사실상 오늘이 제주도에서 야영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야영을 어디에서 할지 여러 번 고민했으나, 매번 먼저 떠오르는 곳은 김녕 해변이었다. 아름다운 바다를 코앞에 두고 야생화가 만발한 푸른 잔디밭에서 뒹굴 수 있으니 다른 곳이 생각나겠는가. 게다가 애들이 좋아하는 모래놀이를 위한 모래사장도 곱고 넓다.
김녕 해변 우리집
김녕 해변에 도착하니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이미 여러 개의 텐트가 차려져 있다. 그렇지. 이렇게 좋은 곳을 세상 사람들이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야영장 한가운데 쳐진 텐트가 처음부터 신경을 거스른다. 남자 두 명이 캠핑하는데,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비메탈 음악을 무도회장처럼 크게 틀어 놓은 것이다. 결국 그 옆의 텐트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다행히 음악 볼륨은 조금 줄어들었다.
동욱이 그림
오후에는 동욱이 동호가 해변에서 놀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동호는 동욱이랑 놀고 싶고, 동욱이는 아빠랑 놀고 싶고. 그래서 삐친 동호가 동욱이에게 모래를 집어 던지고, 화난 동욱이도 동호에게 모래를 던지고. 동호가 먼저 울고, 동호가 우니 동욱이도 덩달아 울고. 애들은 싸우는 것도 일이다.
그래도 별걱정 없는 건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다시 웃고 노니 말이다. 나도 분명 어렸을 땐 저랬을 텐데, 언제 이렇게 미운 마음을 흘려 버리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 되어 버렸을까. 함덕 해변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니 붉은 노을에 온 바다가 타들어 간다. 나도 저렇게 태양과 바람과 구름에 모든 것을 내주는 바다처럼 살고 싶다.
해질 무렵 바다
밤 바다.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의 바다는 절대 풀 수 없는 고차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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