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슛!" (표선해비치해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날이 잔뜩 흐리다. 오늘도 애들은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 안에서 뒹굴며 논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기들끼리도 잘 논다. 덕분에 느긋하게 모닝커피도 즐기고 여유로운 아침이다. 침낭 사건만 터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건은 간단하다. 애들이 엄마, 아빠가 털고 있는 침낭을 붙잡고 장난치다가 넘어진 것이다. 이제 그만하자고 몇 번을 타일지만, 말을 안 듣다 결국 그렇게 된 것. 아빠가 혼을 내자 동욱이가 펑펑 울면서 한 마디 한다. "재미있게 노는 건데 왜 못하게 해!"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지. 아이들에겐 놀이와 재미가 전부지. 그런데 고작해야 빨리 침낭을 털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 재미있는 놀이를 못하게 했으니, 동욱이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웬만큼 위험한 일이 아니고서야 안전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어찌 보면 어른의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결국 아이들 몫이니까. 비록 시간이 걸리고 넘어지고 다칠지라도, 아이들이 그 재미를 온전히 다 누릴 수 있도록, 아빠가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아침을 먹고 김영갑갤러리를 찾았으나 문의 닫혔다. 매주 수요일이 휴관일일 줄이야. 어쩔 수 없이 다시 표선해비치해변으로 향했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으므로 그냥 해변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로 한 것이다.
점심은 표선면 세화리 광동식당에서 먹었다. 식당은 관광지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 있었다. 그래서 관광객은 없고 지역 주민만 눈에 띈다. 메뉴는 두루치기.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고기를 한 대야 내 주시면서 주인아주머니가 "먹을 만큼 퍼가라. 대신 남기면 안 된다."라고 하신다. 우와! 이럴 수가. 그런데 정작 퍼간 고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남길까 봐. 그럼에도 많이 퍼 담았는지 남김없이 먹느라 배가 터질 듯했다.
처음 이 대야를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ㅋㅋ
배불리 먹고 다시 찾은 표선해비치해변. 아이들이 먼저 후다닥 뛰쳐나간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까르르 웃으며 다시 도망쳐 나오길 수십 번. 파도가 무섭다던 동호도 아빠 손을 꽉 잡고 연신 바다속으로 돌진한다.
조동욱 잡아라!
폴짝 뛰어오른 조동욱. 무술을 연마하는 듯.
파도 놀이를 끝낸 다음엔 곧장 모래 놀이를 시작한다. 모래 언덕에 올라 모래를 파고 나르고 쌓고 짓고 부수고.
그렇게 끝을 모르던 아이들의 놀이는 공놀이에서 절정을 맞는다. 오늘 공놀이 제목은 이름 하여 '월드 그랑프리 공 차기 대회'. 동욱이는 천사의 눈물 슛, 정글 스트라이크 슛 등 온갖 만화 영화에서 나온 공격 주문을 외치며 비장하게 공을 찼다. 그러다 내가 "이것만은 못 당해낼걸.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슛!"이라고 외치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게 재미있었는지 자기도 제주도 바다 슛, 제주도 미역 슛 등등을 외치며 공을 차기 시작한다.
공놀이가 끝나자 동호는 또다시 모래 해변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모래를 파서 손도 담그고 발도 묻는다. 동호를 따라 모래를 파보니 모래 밑으로 가라앉은 물이 솟아올랐다. 햇볕을 받아 따뜻하고 보드라운 모래 밑에 물을 머금은 차고 점성이 높은 모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신기했던지 동호는 좀처럼 모래밭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온 얼굴이 모래 범벅이 되고 눈에 모래가 들어가 펑펑 울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동호의 모래삼매경
아무튼, 오늘 하루의 교훈은 단 하나, 아이들의 놀이엔 끝이 없단 사실이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이렇게 조그만 녀석들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에너지가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쩌면 놀이야말로 아이들의 본령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병이 마음껏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도 했다. 하루를 잘 논 아이는 짜증을 모르고 10년을 잘 논 아이는 마음이 건강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잘 놀아 준 동욱이 동호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에 가면 또 언제 이렇게 놀 수 있을지 모르니,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 놀고 놀고 또 놀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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