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5. 16. 16:41

[5 23]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 (표선해비치해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날이 잔뜩 흐리다. 오늘도 애들은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 안에서 뒹굴며 논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기들끼리도 논다. 덕분에 느긋하게 모닝커피도 즐기고 여유로운 아침이다. 침낭 사건만 터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건은 간단하다. 애들이 엄마, 아빠가 털고 있는 침낭을 붙잡고 장난치다가 넘어진 것이다. 이제 그만하자고 번을 타일지만, 말을 듣다 결국 그렇게 . 아빠가 혼을 내자 동욱이가 펑펑 울면서 마디 한다. "재미있게 노는 건데 못하게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 아이들에겐 놀이와 재미가 전부지. 그런데 고작해야 빨리 침낭을 털어야 한다는 이유로 재미있는 놀이를 못하게 했으니, 동욱이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웬만큼 위험한 일이 아니고서야 안전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어찌 보면 어른의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결국 아이들 몫이니까. 비록 시간이 걸리고 넘어지고 다칠지라도, 아이들이 재미를 온전히 다 누릴 수 있도록, 아빠가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아침을 먹고 김영갑갤러리를 찾았으나 문의 닫혔다. 매주 수요일이 휴관일일 줄이야. 어쩔 없이 다시 표선해비치해변으로 향했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으므로 그냥 해변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로 한 것이다.


점심은 표선면 세화리 광동식당에서 먹었다. 식당은 관광지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 있었다. 그래서 관광객은 없고 지역 주민만 눈에 띈다. 메뉴는 두루치기.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고기를 대야 주시면서 주인아주머니가 "먹을 만큼 퍼가라. 대신 남기면 된다."라고 하신다. 우와! 이럴 수가. 그런데 정작 퍼간 고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남길까 봐. 그럼에도 많이 담았는지 남김없이 먹느라 배가 터질 듯했다. 



처음 이 대야를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ㅋㅋ



배불리 먹고 다시 찾은 표선해비치해변. 아이들이 먼저 후다닥 뛰쳐나간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까르르 웃으며 다시 도망쳐 나오길 수십 . 파도가 무섭다던 동호도 아빠 손을 잡고 연신 바다속으로 돌진한다.



조동욱 잡아라!



폴짝 뛰어오른 조동욱. 무술을 연마하는 듯.


 

파도 놀이를 끝낸 다음엔 곧장 모래 놀이를 시작한다. 모래 언덕에 올라 모래를 파고 나르고 쌓고 짓고 부수고. 


그렇게 끝을 모르던 아이들의 놀이는 공놀이에서 절정을 맞는다. 오늘 공놀이 제목은 이름 하여 '월드 그랑프리 차기 대회'. 동욱이는 천사의 눈물 , 정글 스트라이크 온갖 만화 영화에서 나온 공격 주문을 외치며 비장하게 공을 찼다. 그러다 내가 "이것만은 당해낼걸.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이라고 외치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게 재미있었는지 자기도 제주도 바다 , 제주도 미역 등등을 외치며 공을 차기 시작한다.

 

공놀이가 끝나자 동호는 또다시 모래 해변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모래를 파서 손도 담그고 발도 묻는다. 동호를 따라 모래를 파보니 모래 밑으로 가라앉은 물이 솟아올랐다. 햇볕을 받아 따뜻하고 보드라운 모래 밑에 물을 머금은 차고 점성이 높은 모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신기했던지 동호는 좀처럼 모래밭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얼굴이 모래 범벅이 되고 눈에 모래가 들어가 펑펑 울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올 있었다.



동호의 모래삼매경




아무튼, 오늘 하루의 교훈은 하나, 아이들의 놀이엔 끝이 없단 사실이다. 아침에 뜨면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이렇게 조그만 녀석들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에너지가 나올 있는지 도무지 미스터리가 아닐 없다. 


그런데 어쩌면 놀이야말로 아이들의 본령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병이 마음껏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도 했다. 하루를 아이는 짜증을 모르고 10년을 아이는 마음이 건강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잘 놀아 준 동욱이 동호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에 가면 또 언제 이렇게 놀 수 있을지 모르니,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 놀고 놀고 또 놀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alternative
제주유랑가족2013. 3. 25. 23:38

[5월 19일] 달빛 환한 어느 보름날에


벌써 5월 중순이지만, 텐트에서 잠을 자기엔 좀 춥다. 매트를 두 개나 깔아도 바닥엔 한기가 서린다. 짐도 줄일 겸 전기 없이 살아 보자고 전기매트를 가져오지 않은 게 화근이다. 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발밑에 두면 새벽까지 온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 꼭 껴안고 침낭을 둘둘 말아 자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추위보다 더 곤혹스러운 건 소변이다. 오늘 새벽처럼 날이 차면 더 그렇다. 어젯밤에는 맥주도 안 마셨는데. 하루빨리 요강을 장만해야겠다.


오늘 오랜만에 바닷가로 간다. 표선해비치해변. 아이들도 잔뜩 기대가 큰 눈치다. 하지만 들뜬 마음과는 달리 날씨는 흐리고 바다도 쓸쓸하다.


누가 저렇게 소원탑을 쌓았을까



표선해비치해변은 백사장이 엄청나다. 넓이가 16만 제곱미터라니, 축구장 예닐곱 개는 충분히 들어갈 것 같다. 제주도 해변 중에서 아이들이 놀기엔 단연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일단 해변을 휙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 위해 표선면에 있는 '춘자네멸치국수'를 찾았다. 인터넷으로 대략 위치를 알아두긴 했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 번화한 도시도 아닌데 말이다. 전화를 걸어 겨우 찾아간 그곳은 허름한 국숫집. 이렇다 할 간판도 없고 테이블도 두 개 뿐이다. 음식도 단출해 국수와 깍두기가 전부다. 


춘자네멸치국수. 벽지가 예술이야


하지만 맛은 일품이다. 제주도에서 나는 생선 새끼로 낸다는 육수는 정말 진하고 담백하다. 소설가 성석재가 그의 책에서 극찬했다는데, 그럴만하다 싶었다. 게다가 값은 단돈 3천 원. 맛도 가격도, 모든 게 정직하다.


점심도 먹었고, 이제는 한껏 놀 일만 남았다. 해변에 자리를 잡자마자 아이들은 모래놀이에 빠져든다. 쌓고 옮기고 짓고 무너뜨리고, 또 쌓고.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이번에는 잡기놀이를 시작한다. 주로 동욱이가 도망하고 동호가 뒤를 쫓는다. 그러다 뭐가 틀어졌는지 서로 엉엉 울며 싸운다. 그래도 뒤끝은 없다. 금방 친해져서 또 잘 논다.


동욱이는 달리기를 좋아해


동욱이가 화장실에 잠깐 간 사이에 동호가 혼자 제법 멀리까지 나간다. 뛰다, 걷다, 멍하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 그러다가 배시시 웃는다. 그런데 저 넓은 해변을 저렇게 혼자 유유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적적한 느낌이다. 음산하게 흐린 날씨 탓이겠지.


혼자 생각에 빠진 동호



저 표정 봐


제주도 어딘들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특히 표선해비치해변은 4·3항쟁의 상흔이 깊은 곳이다. 1948년 12월, 토벌대는 마을 주민 가운데 18세부터 40세까지 남자들을 모두 뽑아 이곳에서 학살했다. 그리고 여자들에겐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게 했고, 젊고 예쁜 여자들만 따로 뽑았다. 그날은 달빛이 환한 보름날이었다.


그렇게 희생된 4·3항쟁의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부가 발표한 진상보고서는 2만 5천 명~3만 명으로 추산한다. 당시 제주도 주민 10명 중 1명꼴이다. 이들이 희생된 건 제주도에 살았다는 이유뿐이었다.


해질 무렵에는 목욕탕을 갔다. 이번에도 동욱이랑 아빠가 한팀이다. 냉탕에서 잠수 놀이도 하고 사우나에도 처음 들어갔다. 동욱이는 잠수 놀이는 좋아하면서도 사우나는 싫단다.


여기 목욕탕에선 모든 사람이 형님, 동생이다. 하나같이 발가벗은 채로 악수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처음엔 좀 웃겼는데,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 모여 발가벗고 악수하는 곳. 목욕탕이야말로 투명한 마을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 거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저녁은 모처럼 사치를 좀 부렸다. 옥돔국. 흰 옥돔 살과 채 썬 무에 맑은 국물까지, '백색의 미학'이다. 바다 표면 가까운 곳에서 물살을 헤치며 다니는 붉은살생선과 달리 흰살생선은 바다 깊은 곳에 살면서 움직임이 굼뜨다. 그래서 당연히 맛도 다르다. 붉은살생선은 비린 맛이 강하지만, 흰살생선은 담백하다. 온몸으로 만나는 물살의 무늬가 겉모습은 물론 살의 색과 맛까지 바꿔 놓는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돈내코로 돌아오니 아이들은 이미 곯아떨어졌다. 야영장은 다른 날과 달리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Posted by altern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