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8. 29. 17:26

[5월 29일] 그곳이 어디든 무엇을 하든, 거기가 제주라면 그것으로 충분해 (선흘리 동백동산, 평대리 아일랜드조르바)


아침부터 동욱이가 그림을 그려 달란다. 물론 파워레인져. 대개 아빠가 밑그림을 그려주면 색칠은 동욱이가 하는데, 오늘은 왠지 색칠까지 아빠가 하란다. 피곤하기도 하고 색칠까지 해주는 건 아니다 싶어 그냥 나가버렸더니 울고불고 난리다. 그냥 그려줄걸,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애들이 뭔가를 요구할 때 그것이 안 되는 일이다 싶으면 정말 그런지, 어른의 기준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애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그런데 이게 좀 난감한 상황일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잠을 자야 할 시간인데 더 놀겠다거나,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림을 그리겠다거나. 일찍 자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게 좋겠지만, 이게 쉽지 않다. 이건 왜 되는 일이고 이건 왜 안 되는 일인지, 아이들과 합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의 욕구를 충분히 받아주는 것과 안 되는 일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 그 사이 틈이 너무 크다.


오전 10시 반, 오늘은 장모님 덕에 조금 일찍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감기에 걸린 장인어른이 혼자 숙소에 남기로 하고.


오늘 우리가 갈 곳은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이곳은 선흘리 곶자왈에 형성된 내륙습지로 생태 특성과 학술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협약으로 등록된 곳이다. 원래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동산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동백나무 외에도 여러 난대성 수종이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찾는 길이 약간 어려웠는데, 함덕초등학교 선흘분교를 찾아가면 된다.


나무터널로 이뤄진 길을 따라 숲 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땅과 물이 허물없이 만나고 그 위로 나무가 자라고, 또 그 위로 새가 걷고, 꽃도 피고. 이들의 관계로 펼쳐진 숲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조동호 이송 작전 수행 중


멸종위기야생식물 순채


물 위로 나무가 자라고, 물 아래로도 나무가 자란다


나무 뒤 습지와 새


조동욱 저 포즈 좀 봐



오후에는 근 한 달 만에 아내와 단둘이 데이트를 즐겼다. 장모님이 애들을 봐주시기로 한 것. 그런데 엄마와 떨어지는 게 싫은 동호가 엉엉 운다. 애들에겐 약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동안 애들에게 최선을 다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길을 나섰다.


우리가 찾은 곳은 바로 옆 마을 평대리 아일랜드조르바. 원래 월정리에 있던 카페였는데 얼마 전 평대리로 옮겨 왔다. 바닷가에 바로 붙은 카페는 아니었지만, 아담한 마당이 있고 한적했다.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평상에 앉아 그냥 멍하니 있었다. 별다른 얘기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냥 바닷소리 듣고, 나무 냄새 맡고, 햇살도 즐기고. 그곳이 어디든 무엇을 하든, 거기가 제주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월정리 숙소로 돌아오니 동호가 엄마에게 와락 안긴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엄마를 만난 기쁨과 그간의 슬픔이 동시에 묻어나는 표정이다. 그덕에 동호는 오늘밤 엄마 옆에서 원없이 물고 빨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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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7. 26. 13:39

[5월 28일] 월정리 바닷가를 거니는 두 여인 (월정리)


어젯밤엔 바람이 없어 잘 잘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딱 한 번 깬 것 같은데, 멀리서 뱃소리와 종소리가 들린 듯 했다. 너무 편안한 소리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꿈속에서 들린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텐트 안에서 뒹굴뒹굴하다 동욱이랑 동호가 또 싸운다. 동욱이가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동호가 자기도 그리겠다고 나섰고, 그걸 막으려던 동욱이와 동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뭐, 늘 비슷한 패턴이다. 서로 아빠를 차지하겠다는 녀석들의 결투랄까.


오늘은 멀리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오신다. 오늘부터 마지막 날까지 나흘간 같이 머물 예정이다. 목포에서 배를 탔다는 장인어른 전화에 부랴부랴 텐트 정리에 나선다. 


일단 월정리 민박집에 짐을 풀고 제주여객터미널로 나간다. 12시 30분쯤 배가 도착할 텐데, 그 사이에 아내에게 할 일이 생겼다. 새로운 일자리 때문에 급히 이력서를 써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금방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좀 더 쉴 수 없어 괜히 미안하다. 게다가 여행이 사흘밖에 남지 않은 이 상황에 이력서를 쓰기 위해 PC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그깟 일자리쯤은 서울 올라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호기롭게 아내 팔을 붙잡고 바다로 향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무래도 미안하다.


아내가 PC방으로 들어가고 애들이랑 나는 그동안 놀 곳을 찾아 주위를 배회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으면 애들은 책을 보면 좋겠다 싶어 기적의도서관, 달리도서관 등등을 전전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간 곳은 제주시청 앞마당. 그나마 한적하고 그늘이 많아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별다른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이내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파워레인저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호에게는 마이쮸 하나를 물려주고. 그랬더니 어찌나 평온한지.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드디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제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전복물회로 제주의 맛을 선사해드리고자 도두항 순옥이네명가로 모셨다. 역시 시원하고 꼬들꼬들한 맛이 일품이다.


월정리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동문시장에서 장을 봤다. 과일이랑 반찬거리도 사고 고모네랑 외삼촌네 보낼 한라봉도 주문했다. 오메기떡도 사 먹고. 오메기떡은 차조가루를 반죽해 삶고 팥고물을 묻힌 제주지역 전통 음식이다.



고래가 될 카페에서 본 월정리 바다



역시 월정리 바다가 최고야



일찌감치 저녁을 해먹고 온 가족이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아내가 장모님 손을 잡고 월정리 바닷가를 걷는다. 아내는 세상 모든 딸이 그렇듯 결혼 후 장모님과 관계가 더욱 애틋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아들은 결혼하면 남이 되어 버리지만, 딸은 비로소 자식 노릇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남성이 중심인 가부장제는 잘못된 제도가 분명하다.


결혼하고 가장 힘든 게 처가 식구와의 관계였다. 30년 가까이 생면부지였던 사람들을 갑자기 가족으로 여겨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직장도 아니고 수입도 변변찮아서 장인어른, 장모님에겐 늘 자격지심이 컸다. 언제 번듯하게 살거냐는 잔소리는 그냥 흘려버리면 될 것을 마음 한편에 쌓아두고 섭섭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못난 사람처럼 경거망동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 형편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마음은 그냥 편안하다. 시간이 해결해준 것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아내의 도움이 컸다. 아내가 나의 자존감을 세워줬기 때문이다. 아내는 늘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흔쾌히 모셨다. 아내에게,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이번 여행이 좋은 선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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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7. 10. 16:48

[5월 27일] 마네킹 가슴을 훔친 아이 (김녕 해변)


아침 7시, 오늘도 어김없이 햇볕이 쨍! 내리쬔다. 아침 일찍 일어난 동욱이 동호가 어제부터 빨래집게를 가지고 논다. 나도 어렸을 때 빨래집게를 잘 가지고 놀았는데, 마당이 없어지고 빨래건조대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빨래집게도 사라졌다. 물고 물리는 단순한 규칙으로 비행기가 되고 로봇이 되는 빨래집게는 오늘날 레고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놀잇감이다. "아빠도 어렸을 때 이거 가지고 놀았대."라며 놀이에 열중하는 동욱이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은 모구리야영장에서 철수하는 날이다. 짐을 싸는 것도 일이지만, 야영장과 주차장이 멀어 그 많은 짐을 손수 옮기는 것도 일이다. 몇 번을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며 짐을 옮기는데, 아뿔싸! 자동차 열쇠가 트렁크 속으로 딸려 들어가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결국, 보험회사 긴급출동 차량을 부르고 나서야 겨우 모구리야영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구리야영장에서 나와 김녕 해변으로 향하는 중 잠깐 마트에 들렀다. 동호를 카트에 태우고 이것저것 물건을 살피고 있는데, 주위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돌아보니, 동호가 카트 위에 서서 수영복 속으로 손을 넣어 마네킹 가슴을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동호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는데, 어찌나 민망하고 당황스럽던지 진땀이 삐질삐질 났다. 동호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니, 녀석은 천연스레 배시시 웃기만 할 뿐이다.


둘째라 그런지 몰라도 동호는 24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엄마 찌찌를 찾는다. 그것도 굉장히 자주. 게다가 동호는 신체적 발육이 빨라 언뜻 보기에는 30개월도 더 돼 보인다. 그런 녀석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엄마 찌지를 찾으니, 당황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오늘 같은 사건이 터진 것. 동호 말고 백주에 마트에 전시된 마네킹 가슴을 훔친 자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마침 최근 논란이 된 타임지 표지 사진이 떠올랐다. 3살 된 남자아이가 의자에 서서 26살 엄마 젖을 물고 있는 사진이다. 표지 제목은 "Are you mom enough?" 아이가 어릴 때 부모와 맺은 정서적, 육체적 유대감이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애착 이론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포대기육아법'이라는 우리의 전통적인 육아 방식이 관심을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면 마네킹 가슴에 손을 댄 동호를 탓할 일은 아니지 싶다. 여전히 엄마의 찌찌에 목말라 하는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랑과 애착이 아닐지 모르겠다.


오늘 다시 김녕 해변을 찾는다. 내일부터는 제주도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사흘 동안 민박을 할 예정이라, 사실상 오늘이 제주도에서 야영으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야영을 어디에서 할지 여러 번 고민했으나, 매번 먼저 떠오르는 곳은 김녕 해변이었다. 아름다운 바다를 코앞에 두고 야생화가 만발한 푸른 잔디밭에서 뒹굴 수 있으니 다른 곳이 생각나겠는가. 게다가 애들이 좋아하는 모래놀이를 위한 모래사장도 곱고 넓다.



김녕 해변 우리집



김녕 해변에 도착하니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이미 여러 개의 텐트가 차려져 있다. 그렇지. 이렇게 좋은 곳을 세상 사람들이 모른다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야영장 한가운데 쳐진 텐트가 처음부터 신경을 거스른다. 남자 두 명이 캠핑하는데,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헤비메탈 음악을 무도회장처럼 크게 틀어 놓은 것이다. 결국 그 옆의 텐트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다행히 음악 볼륨은 조금 줄어들었다.



동욱이 그림



오후에는 동욱이 동호가 해변에서 놀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동호는 동욱이랑 놀고 싶고, 동욱이는 아빠랑 놀고 싶고. 그래서 삐친 동호가 동욱이에게 모래를 집어 던지고, 화난 동욱이도 동호에게 모래를 던지고. 동호가 먼저 울고, 동호가 우니 동욱이도 덩달아 울고. 애들은 싸우는 것도 일이다. 


그래도 별걱정 없는 건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다시 웃고 노니 말이다. 나도 분명 어렸을 땐 저랬을 텐데, 언제 이렇게 미운 마음을 흘려 버리지 못하는 못난 어른이 되어 버렸을까. 함덕 해변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니 붉은 노을에 온 바다가 타들어 간다. 나도 저렇게 태양과 바람과 구름에 모든 것을 내주는 바다처럼 살고 싶다.



해질 무렵 바다



밤 바다.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의 바다는 절대 풀 수 없는 고차함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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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6. 12. 12:46

[5월 26일]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를 쫓아 (김녕 해변, 월정리~평대리~세화리~하도리, 어느 이름 없는 해변) 


갑자기 쨍! 햇볕이 내리쬔다. 타프스크린이 없는 우리 텐트로는 속수무책이다.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다. 오늘 하루 얼마나 더우려고 아침부터 이러는지. 이렇게 더운 날엔 뭐니 뭐니 해도 물놀이가 최고인 법, 우리는 서둘러 김녕 해변으로 향했다. 


다시 찾은 김녕 해변은 변함없이 고왔다. 발그스레한 홍조를 띤 새색시 같다. 그런데 오늘 김녕서포구에서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올레20코스가 개통되는 모양이다. 제주의 숨겨진 보물 같았던 월정리, 평대리, 세화리 해변에 이제 곧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슬프다. 이제는 다시 못 볼 나만의 월정리, 평대리, 세화리 바다를 가슴에 담으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세화리를 지나 구좌읍 하도리에 닿으면 제주해녀박물관이 나온다. 제주해녀박물관이 여기에 세워진 것은 이곳이 일제강점기 해녀들의 항일운동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보통 항일운동이라고 하면 31 운동을 일으켰다는 민족대표 33인과 같이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주체로 등장하기 마련인데, 해녀들이 항일운동을 일으켰다고 하니 신기하고 새롭다. 교과서의 역사가 왕들의 역사인 것처럼 나 역시 민중의 저항을 몇몇 지도자만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럽고 죄스럽다.


제주도가 다 그렇지만, 특히 이곳 세화와 하도, 성산, 그리고 바다 건너 우도는 자연환경이 척박하기로 유명하다. 밭은 자갈과 모래뿐이며 하늘엔 바람뿐이다. '동촌 여자들이 서촌 여자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난다'는 말이 보여주듯 이곳 여성들의 삶은 제주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억척스러웠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는 고달픈 민중의 삶의 숨겨져 있다.


당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해녀는 1만 7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집회와 시위 횟수도 200여 건,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봉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대규모로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발행했던 것은 부당한 해산물 수매가격 때문이었다. 해녀어업조합이 뇌물을 준 일본인 상인에게 턱없이 늦은 가격으로 해산물을 사들일 수 있도록 특혜를 줬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해녀들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고, 결국 이들의 요구는 대부분 관철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녀들이 강력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불턱의 힘이 컸다. 제주 해안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불을 쬐면서 쉬던 곳이다. 그런데 불턱은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해녀들은 그곳에서 서로의 삶과 아픔을 나눴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며 토론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불턱에서 여인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모의하고 단결을 도모할 것이란 사실을.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하도 해변이다. 거의 다 온 것 같은 느낌에 천천히 차를 몰며 주위를 살피는데, 불현듯이 길가로 난 작은 숲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뭘까. 뭔가에 홀린 것처럼 차를 세우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마치 회중시계를 찬 하얀 토끼를 쫓아 토끼 굴로 들어갔던 앨리스처럼 말이다. 우리도 차를 타고 가는 게 슬슬 지겨워진 것이 분명했다.



저기 깡총깡총 뛰어가는 토끼 좀 봐



그랬더니 세상에! 이렇게 멋진 해변이 숨겨져 있다니! 우도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작은 해변에는 금빛 모래와 푸른 바다가 햇빛을 머금고 반작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와서 놀라고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작은 해변 하나를 완전히 독차지한 채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떻게 물이 이렇게 맑을 수 있지?



저 하늘은 또 어떻고



춤추는 가족



날아라, 신발 우주선



까르르~~~



꿈속에서 깨어 나와 야영장으로 돌아오니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아졌다. 이제 모구리야영장과도 작별할 시간이 되었구나 싶었다. 애들 씻기고 동호 기저귀 입히느라 씨름하는데 동욱이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 아빠 옷을 잡고 늘어진다. 동호도 재미를 붙었는지 까르르 웃으며 기저귀 안 입겠다며 발버둥을 친다. 몇 번을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짜증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결국 "아이 몰라 나도 안 해!"라며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랬더니 애들도 쪼르륵 따라나오더니 씩 웃으며 아빠 뒤만 쫓아다닌다. 아휴,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아빠를 들어다 놨다 하는구나.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기저귀를 차든지  말든지, 그냥 재미나게 놀기나 하자구나!



모구리야영장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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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5. 27. 17:27

[5월 25일] 상상의 섬, 이어도의 비밀 (김영갑갤러리, 세화오일장)


밤새 빗줄기는 굵어져 아침까지 이어진다. 텐트 안에서 뒹굴며 잘 놀던 아이들은 어느새 지겨워졌는지 아침을 먹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간다. 동호는 손이며 발이며 할 것 없이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논다. 얼른 씻기고 챙겨 김영갑갤러리로 향한다.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갤러리는 폐교였던 삼달분교를 다시 고쳐 만든 미술관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갖가지 나무와 꽃, 그리고 조각물로 이뤄진 정원이 나온다. 그곳에서 비를 머금은 땅과 꽃, 풀, 돌이 더욱 짖게 자기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는, 한가지 색으로 세상을 덮어버리는 눈과 달리, 자신의 색을 찾아준다. 그래서 비가 좋다.



미술관 정원에서 놀고 있는 조동호



김영갑은 제주의 외로움과 평화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예술가이다. 1985년 이 섬에 정착한 이후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그러던 중 루게릭병을 진단받았지만, 김영갑은 셔터 누르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몸소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영갑갤러리가 2002년 문을 열었고, 김영갑은 투병 생활 6년 만에 이곳에서 고이 잠들었다.


"우리가 항상 유토피아적 삶을 꿈꾸듯 제주인들은 수천 년 동안 상상 속의 섬 이어도를 꿈꾸어 왔다. 제주를 지켜온 이 땅의 토박이들은,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상적 삶에 절약, 성실, 절제, 인내, 양보가 보태져야 함을 행동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나(제주)다움을 지키지 못한다면 꿈은, 영원히 꿈에 머문다. 제주인들처럼 먼저 행동으로 실천할 때 이어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김영갑갤러리에 걸린 김영갑의 말이다. 김영갑은 제주도의 산과 들과 바다를 찍으면서 제주인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주도의 풍경만큼이나 그 삶의 흔적도 다채로웠다. 어쩌면 상상의 섬 이어도는 다름 아닌 제주도 그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김영갑은 삶의 고단함이 만들어낸 외로움과 평화를 동경했고, 끝내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육신의 움직임이 둔해져 하루가 느리고 지루하다. 일상은 단순하고 탄력이 없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하늘이다. 풀과 나무가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주저 없이 자신을 자연에 내맡겼다."


김영갑갤러리에서 나와 다시 성산읍으로 가기 위해 삼달리부터 성산읍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렸다. 며칠 전 높은 파도와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는 흐리멍덩한 하늘처럼 고요하게 변해 있었다. 바다는 하늘을 닮는 법이다.



오늘 바다가 쓸쓸하다



성산일출봉을 뒤로, 외로운 의자 하나



성산일출봉 입구 경미휴게소에서 해물라면을 먹었다. 말이 휴게소지 식당이다. 나름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데, 무늬만 해물이 아니라 진짜 해물이 들어간 라면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이쯤 되면 해물라면이 아니라, 라면 사리가 들어간 해물탕이라고 해야 맞다.



작고 평범한 식당이지만, 정말 많은 사람의 손길을 닿은 곳이다



성산일출봉은 산밑까지 유명 커피전문점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세계7대경관' 선정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자본에 포섭되고 요란한 선전만 난무하는 관광 정책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세계7대자연경관'이라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기투표로 순위 매김하겠다는 발상부터 문제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 선정되려고 쓴 전화비용만 수백억이라고 하니, 정부가 국제적인 보이스피싱 사기에 걸려든 건 아닌지, 한심하고 부끄럽다.


서둘러 성산일출봉을 빠져나와 근처 방듸카페에서 커피가루를 사 들고 세화오일장으로 향한다.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세화오일장은 5일과 10일마다 열리는데,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있어 경치가 정말 좋다. 게다가 활짝 갠 날씨까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깊이에 따라, 바다 밑 모습에 따라, 햇볕이 닿는 위치에 따라 사파이어에서 에메랄드까지 온갖 보석이 한데 어우러진 느낌이다. 세화오일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장이다. 



정말 근사한 바다지?



조동호 브이



도저히 장만 보고 그냥 갈 수 없어 동욱이랑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동욱이도 바다라면 언제나 오케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바닷가에서 놀고 먹고 즐기며 예정에도 없는 시간을 보냈다. 발길 닿는 곳으로 흐르다 마음 닿는 곳에서 멈춰 놀고, 이보다 멋진 여행이 어디 또 있을까.



열심히 뛰어 다니는 조동욱



물질 나가는 잠녀. 얼마나 외롭고 두려울까.



저녁 늦게 모구리야영장으로 돌아오니 석가탄신일이 낀 황금연휴를 맞아 캠핑을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약간 짜증스러웠을 텐데, 오늘만큼은 마음이 여유롭다. 하루를 잘 보낸 탓이겠지. 밤늦게까지 김영갑의 중산간 사진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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