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라오스 방비엥)
도마뱀이었다. 어젯밤 자리에 누우려고 불을 끄려는 순간 불현듯 출몰한 녀석. 두 쌍의 다리와 아랫배, 심지어 꼬리 끝까지 잔뜩 힘을 주고 천정에 딱 달라붙어 있던 녀석은 내가 자기를 발견한 것을 직감이라도 했는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라도 잠든 내 몸을 누비고 다니는 건 아닐지. 자리에 누웠지만, 불안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다. 다시 불을 켰다. 녀석에게 내가 잠들지 않았음을 알려야 했다. 그러니 허튼수작 말고 조용히 짱박혀 있으라고.
라오스에서 도마뱀만큼 흔한 동물도 없다. 집집이 벽면 가득 도마뱀이 기어 다니기도 한다. 동욱이와 동호에게 “저기 좀 봐. 도마뱀이야. 어때? 귀엽지?”라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런데 방안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아무리 작고 해가 없는 녀석이라도 파충류가 아닌가. 툭 튀어나온 두 눈에 혀를 날름거리며 축축한 표피를 가진 파충류와 함께 잠을 자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하얗게 지새고 말았다. 젠장! 차라리 눈에 띄지나 말지, 하필 불 끄고 자려는 순간 나타날 게 뭐람. 이게 다 의도치 않게 숙소를 옮긴 후과라고 생각하니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부터 옮겼다. 미리 봐둔 곳은 빌라 방비엥 리버사이드(Villa Vangvieng Riverside). 남송브릿지 넘기 바로 직전에 있는 곳이다.
이번에 숙소를 고른 기준은 수영장이다. 쏭강에서 튜빙이나 카약을 즐기지 못하는 대신 수영장에서 실컷 놀 작정이었다. 그래서 어제와 그제 오가며 눈여겨봐 둔 곳이 바로 빌라 방비엥 리버사이드다. 그 바로 맞은편에 있는 리버사이드 부티크 리조트(Riverside Bouti이que Resort)도 눈에 띄었지만, 너무 비싸다. 시설이 아주 좋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빌라 방비엥 리버사이드는 아고다(www.agoda.com)에서 57.50달러. 이것도 약간 비싼 감이 없지 않지만, 수영장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 흔쾌히 결정했다.
애초 라오스로 떠나면서 첫날 빼고는 숙소를 예약 하지 않았다. 현지에서 돌아다니며 그때그때 잡을 요량이었다. 마음에 드는 숙소가 있으면 들어가서 구경하고 가격을 알아봤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비교했다. 주로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와 아고다, 익스피디아(www.expedia.co.kr)를 이용했다. 여행하기 참 좋은 세상이다.
숙소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수영장이 눈에 띈다. 쏭강과 카르스트 지형의 멋드러진 산들을 배경으로 한 야외수영장이다. 와우, 멋지다!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내 생에 이렇게 멋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게 될 줄이야. 황송하기까지 하다. 애들도 신이 나서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입수했다. 동욱이는 구명조끼를 입고 동호는 튜브를 찼다. 물이 깊어서 걱정이었지만, 잘 논다. 부대끼는 사람 단 한 명도 없이, 멋드러진 풍경을 배경까지, 하늘 아래 이런 수영장이 어디 또 있을까.
해가 중천을 넘긴지도 한참이나 지났지만, 애들은 밥 먹을 생각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 오기로 했다. 팬케익과 샌드위치, 오렌지쥬스를 사들고 돌아오는데 한 꼬마 아이가 앞서 지나간다. 동욱이 나이쯤 되었을까. 윗옷을 벗은 채, 바지춤이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약간 망설였지만, 뒷모습이니 괜찮겠다 싶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아뿔싸!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게 아닌가. 이미 눌러진 셔터를 무를 수도 없고, 어쩌나. 엉겁결에 “쏘리”라고 내뱉었지만, 영 마음에 걸린다.
라오스에 오면서 사진을 많이 찍고 싶었다. 렌즈도 장만하고 삼각대도 구입했다. 그런데 사진 찍는 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 사람을 찍는 게 그렇다. 오리엔탈리즘이랄까. 카메라 렌즈에서 우월감과 동정심을 걷어낼 수 없다. 머리로는 그러지 말자고 되뇌지만, 자꾸 비교하게 된다. 때로는 연민하고 심지어 안심하며, 구경꾼의 시각으로 그들을 타자화시킨다.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방으로 들어와 며칠 묵혀둔 빨래를 했다. 문제는 널어둘 곳이 없다는 점. 하는 수 없이 노끈을 사와 방 안을 가로질러 빨랫줄을 설치했다. 벽에 박힌 못이 없어 커튼 봉을 이용해 가까스로 빨래를 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젖은 빨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커튼 봉이 부러져 버렸다. 이걸 어쩐다. 자진 신고해야 할지 모른 척해야 할지.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남은 노끈으로 부러진 봉을 묶고 대충 수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설마 나중에 발견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진 않겠지.
온종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물놀이에 전념한 탓에 해가 지기도 전에 허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배를 두드리며 돌아오는데, 점입가경이라더니 이번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 주먹만 한 귀뚜라미가 방에서 파드닥대며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차라리 조용히 천장에 붙어 있는 도마뱀이 낫지, 저렇게 요란뻑적지근하게 나부대는 귀뚜라미라니. 혹시 바퀴벌레인가. 가뜩이나 너무 커서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생각이 바퀴벌레에게까지 미치니 소름이 돋아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얼른 수건을 집어 들고 귀뚜라미에게 돌진, 무차별적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침대를 이리저리 밀어젖히고 수없이 사방을 난타한 끝에 겨우 귀뚜라미를 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커튼 봉에 이어 침대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겨우 아귀를 맞춰 침대를 올려 얹으니 다행히 무너지진 않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체크아웃하자마자 멀리 떠야겠다.
잠자리에 들며 동욱이에게 물었다. 대체 뭣 하러 이리 멀리 와서 고생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서울에도 수영장은 많은데 말이다.
“동욱아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뭐가 제일 좋았어?”
“오늘 수영한 거.”
“보트 탄 것 보다 수영한 게 더 좋아?”
“응.”커히
심보선 시집을 한 권 들고 와서 읽고 있다. 오늘 마음에 남는 시는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다. 낮에 마주한, 그 아이가 다시 떠오른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내역 |
금액 |
숙소 |
57.50$(460,000낍) |
점심(팬케익, 치즈케익, 치킨샌드위치, 오렌지쥬스2, 아이스커피2) |
145,000낍 |
빨랫줄 |
10,000낍 |
저넉(불닭볶음, 계란말이, 공기밥) |
124,000낍 |
라오맥주2 |
20,000낍 |
합계 |
759,000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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