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동호가 호루라기를 사달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를 사 줬다. 빨간색이 예쁜 호루라기였다. 동호도 마음에 드는지 연신 불어대며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녁에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던 길에 벌어졌다. 동호가 호루라기를 두고 왔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울며불며 고집을 피웠다. 내가 마지못해 하나 더 사주겠다고 하자, 온종일 신경이 날카롭던 아내가 대뜸 자기 물건 못 챙겨서 벌어진 일이니 절대 사줄 수 없다고 응수했다. 아니,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자기 물건을 잘 챙길 수 있다고 그러는지, 값나가는 물건도 아니고 ‘꼴랑’ 오백원짜리 호루라기가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여행이고 뭐고 꼴도 보기 싫어 자리에 누워 버렸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며 이러다간 필시 여행 가서도 '주구장창' 싸우고만 돌아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다 말고 습관처럼 페이스북을 들여다본다. 아내가 지난 새벽 2시에 글을 남겼다. 미안한 건 또 내 몫이다.
“12일, 결코 짧지 않은 여행을 앞두고 도진 몹쓸 불안증. 잠자면 큰일 날 것처럼…. 출근해서 출국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분초를 가르며 줄 세우고, 내가 있으나 마나 해결되지 않을 업무들조차 걱정하고 염려하다 이쯤 되면 병은 아닐까 싶어 또 걱정을 업는다. 숨이 가빠졌다 심장이 벌컥거리다 유난히 내 불안과 곤두선 신경 덕에 오늘 하루 찬물 한 바가지씩 쏟긴 남편과 아이들. 예민함은 왜 늘 나를 바라보기보다 외부로 향할 때가 더 많은지. 별 준비 없이 가는 라오스, 서로 많이 사랑하고 아끼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이면 좋겠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머지 짐을 다 꾸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내와 두 아들 녀석을 흔들어 깨웠다.
“자기야, 얘들아, 어서 일어나. 오늘 라오스 가는 날이야!”
라오스로 가는 항공편은 생각보다 많다. 그중 직항은 라오항공과 진에어 두 개. 라오항공은 일주일에 네 번(화, 목, 금, 토요일 10시 40분) 인천공항을 출발하고, 진에어는 일주일에 두 번(월, 금요일 19시 20분) 출발한다. 우리는 요금이 가장 저렴한 쪽으로 알아봤고, 9월 1일 월요일에 출발해서 9월 12일 금요일에 돌아오는 진에어를 선택했다. 무려 12일간의 여행, 38년 만에 가장 빠르다는 추석 연휴에 미뤄둔 여름휴가를 한꺼번에 몰아 쓴 덕에 가능했다.
온 가족이 배낭 하나씩 둘러메고 집을 나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느긋하게 탑승수속 받고 출국심사대를 벗어나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면세점이 펼쳐진다. 여행을 소비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미리 사둔 아내 선글라스와 카메라 렌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 엄마, 아빠처럼 곧 돼지가 되어버리진 않을지 모르겠다.
서둘러 127번 탑승게이트를 찾아 이동, 라오스 비엔티안행 LJ015편 비행기에 탑승했다. 저가항공이라 그런지 탑승게이트도 멀고 비행기 좌석도 좁다. 바로 코앞이 앞사람 머리다. 이렇게 옴짝달싹도 못한 채 5시간 20분을 날아가야 한다니. 그래도 뭐, 싼값에 항공권을 끊을 수 있어 좋다. 라오스는 9월까지 우기가 이어져 지금은 여행 비수기다. 항공권도 성수기보다 조금 싼 편인데, 대략 40만 원대. 그런데 우리는 운 좋게도 331,900원에 끊었다. 몇 날 며칠 눈팅만 하다 8월 20일 예약을 하려고 홈페이지를 열었더니 갑자기 10만 원이나 뚝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수요일에 항공권이 뚝 떨어진다더니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다.
7시 20분.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한다. 서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속도를 높인다. 비행기가 이륙을 결심한 것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날개 위, 아래의 압력 차이로 생기는 약력(揚力) 때문이다. 이를 위해 비행기는 일정 정도의 속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속도를 넘긴 비행기는 설사 비행기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일단 날아야 보다한다. 비상은 일정한 도움닫기와 단 한 번의 결심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비행기가 뜨자 심장이 쫄깃해진다. 일상을 휘감고 있던 중력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순간 느낄 수 있는 쾌감이다. 하지만 쾌감도 잠시, 좁은 항공기 안에서 5시간 이상 앉아 있어야 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나 역시 얼마나 졸았을까. 한참이 지나 기내 방송에 잠이 깼다. 베트남 상공을 날고 있다며 20분 후 라오스 왓따이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란다. 좁은 창문을 통해 저 멀리 수없이 작은 불빛들이 반짝인다.
현지시각 10시 40분(라오스와의 시차는 두 시간), 비행기는 무사히 왓따이 공항에 도착했다. 후텁지근한 더위와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우리를 제일 먼저 반긴다. 간단한 입국심사(라오스는 비자 없이 15일간 체류할 수 있다.)를 마치고 나오자 미리 예약해둔 숙소에서 나온 분이 우리를 픽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밤늦게 도착하는 탓에 첫날 숙소만 미리 예약해 둔 것이다.
비엔티안의 밤거리는 조용했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픽업 차량으로 나온 현대차를 타고 공항에서 가장 큰 삼성 광고판을 보며 여기가 정말 라오스가 맞는 것인지 잠깐 생각했다. 두 시간을 거슬러 날아온 이곳은 과연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지. 괜스레 쫄린다. 생전 처음 만나는 라오스인이 우리를 제대로 데려다 줄 것인지도 걱정이다. 조심스럽게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 물었다. 그는 수다스럽지 않았고 우리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다행이다. 대화는 짧았지만, 안도감은 커졌다.
“하우 롱 더즈 잇 테이크 투 호텔?”
“어바웃 텐 미닛츠. 웨어 아 유 프럼?”
“코리아”
10분 남짓 달려 도착한 숙소는 홈페이지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속았구나 싶었다. 짐 풀고 씻고 애들 재우고 나니 맥주가 간절하다. 그래도 나갈 순 없다. 편의점 따위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무섭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잠자리에 든다. 불을 끄니 낯선 공기가 나를 잠식할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여러모로 여긴 라오스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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