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우리 애들은 마쿠로쿠로스케를 안 만났나 몰라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4일째 날, 원래 계획은 여기서 하루 더 묵을 예정이었는데 밤에 비가 온다고 해서 고심 끝에 오늘 철수하기로 했다.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 내수압이 높은 텐트를 고르긴 했지만, 텐트 속에서만 있을 수도 없고 해서 그렇게 결정했다. 문제는 급하게 민박을 구하는 것. 일단은 며칠 전에 금능포구 마을에서 봤던 민박집에 가보기로 했다.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다를 향해 작은 잔디밭이 있는, 꽤 인상적인 민박집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집은 여름철 성수기에만 민박을 했다. 그리고 사정은 다른 집들도 똑같았다. 이럴 수가! 발을 동동대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이 동네 거의 마지막으로 보이는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도 마찬가지. 주인아주머니는 아직 정리가 안 됐다며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래도 괜찮으니 제발 받아만 달라고 애원했다. 아주머니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럼 오늘 하루만 지내라고 하셨다.
복자민박
민박집 이름은 복자 민박이다. 작고 허름한 옛날 집이었지만, 그래도 싸고 깨끗했다. 게다가 방이 셋이나 딸린 독채다. 무엇보다 동욱이, 동호가 신이 났다. 마당이며 마루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한다. 미닫이문, 나무창틀, 아래위로 작동하는 스위치, 빨랫줄 등등 모든 게 신기한 듯 만져보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웃집토토로>에서 사츠키와 메이가 이사 간 낡은 시골집에서 처음 뛰어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먼지 귀신 마쿠로쿠로스케를 안 만났는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이놈들 더 재밌을 텐데 말이다.
빨래하고 점심은 짜장라면으로 때우고 바닷가로 후다닥 달려갔다. 며칠 동안 모래 놀이를 못한 동욱이가 빨리 바닷가로 나가자고 난리다. 금능해변은 며칠 새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구름 사이로 쏟아 붓는 햇살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바다와 한데 어울려 지난번에 미처 보여주지 못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저 햇살 좀 봐. 근사하지?
한참을 모래 놀이에 빠져있던 동욱이가 아빠 손을 잡더니 저기 저 깃발까지 가보자고 한다. 비양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 그러니까 바닷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펄럭이고 있는 빨간 깃발이다. 약간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동욱이 손을 잡고 깃발로 향했다. 깃발 근처에 다다르자 나로서는 더는 전진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깃발까지는 불과 10여 미터, 하지만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무섭다. 깊은 바다도 아니고 높은 파도도 아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동욱이는 더 가고 싶다며 한 마디 던진다. "아빠는 어른인데 왜 이렇게 겁이 많아?" 황당하다. 지도 엄청 겁 많으면서. 야, 조동욱, 너도 나 닮았거든!
내겐 너무 먼 당신!
엄마, 아빠가 저녁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은 '제주말놀이'에 빠졌다. "했쑤꽈?", "있수꽈?", 자기들끼리 똑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자지러지게 웃는다. 처음 입에 붙은 독특한 말들이 꽤 흥미로운가 보다.
제주말은 일반적으로 끝이 짧고 소리가 높다. 이는 거센 바람과 척박한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한다. 제주말이 바람의 말인 까닭은 분명해 보인다. 이 때문에 제주말은 우리말의 다른 방언과 달리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독립적인 언어로 인정하기도 한다. 유네스코는 제주말을 '소멸 위기 언어'로 등록하기도 했다.
물론 언어와 방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언어적 특성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상황까지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라져가는 제주말을 복원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금, 하나의 언어만 존재했던 아담의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욕심일 뿐이다. 바벨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내려진 형벌인 단절과 소외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의 말과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과 해방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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