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제주의 눈물, 귤
제주도의 밤은 별빛으로 더욱 빛난다. 이른바 '빛공해'로 별 보기가 어려워진 요즘이지만, 제주도만큼은 어디서나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젯밤 유난히 많은 별이 반짝거렸다. 밤하늘에 눈을 맞추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마치 캄캄한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하나둘씩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느새 하늘 전체를 가득 메웠다.
별이 스스로 빛을 내는 건 그만큼 자기 질량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가장 찬란한 빛을 내고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고흐가 자신의 마지막 생의 문턱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결국, 아름답다는 건 어쩌면 내면의 지독한 고독과 아픔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제주의 밤하늘이 고흐의 그림처럼 흔들린다.
아침에 일어나 동호 옷을 입히는데 동욱이가 입히는 족족 다시 벗겨 동호 엉덩이를 쳐다보며 까르르 웃는다. 하도 짓궂어 "남의 엉덩이를 왜 봐!"라며 혼을 냈더니, 이런다. "치, 가족이 남이야?" 나 원, 참. 저런 재치있는 말솜씨는 언제 배운 건지. 아니면 설마, 동호를 정말 자기처럼 생각하는 걸까.
이불도 널고 커피도 내리고. 아침이 여유롭다.
어제 남은 미역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원앙폭포에 잠깐 들렀다. 원앙폭포는 돈네코야영장에서 큰길을 건너 10분 정도 숲 속으로 걸어가면 나온다. 그런데 그 잠깐 만나게 되는 어스레한 원시림이 보통이 아니다. 사스레피나무, 종가시나무, 동백나무, 구실잣밤나무 등이 매트릭스코드처럼 온 공간을 뒤덮어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길 같은 느낌이다. 또 양 갈래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는 어찌나 맑은지, 숨겨진 비경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다.
조동욱은 또 정글포스 포즈야.
오늘 주요한 일정은 쇠소깍 테우체험이다. 그런데 쇠소깍으로 가는 중에 동호가 잠이 들었고,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근처에 있는 감귤박물관으로 향했다. 동호는 엄마랑 차에게 계속 잠을 자고 동욱이만 아빠를 따라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제주도는 귤의 섬이다. 곳곳에 귤나무가 심어져 있고 거리마다 귤가게가 늘어서 있다. 우리도 매일같이 한 봉지씩 사서 원 없이 먹었다. 우리가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쓴 돈의 1할은 아마 귤값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말 물리지 않고 먹으면 먹을수록 맛있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쉽게 귤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11년 프랑스 출신 신부가 일본에서 온주밀감 15그루를 들여와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터 감귤 재배 면적이 본격적으로 늘었고, 자식들 모두 대학에 보낼 밑천이 되었다며 '대학나무'라고 불릴 정도로 소득이 가장 높은 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귤 대중화 이면에는 재래품종의 쇠퇴라는 아픔이 존재한다. 애초 재주에는 금귤, 산귤, 동정귤, 유자, 유감, 당유자, 홍귤, 감자, 석금귤, 편귤, 사두감, 주감 등 22개 품종이 재배되었지만, 지금은 몇몇 품종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졌다. 오렌지 등 수입 과일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사라진 다양한 토종 감귤을 다시 살려야 할 때가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도 귤 이야기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감귤봉진>이다. 조선 숙종 때 그려진 그림으로, 각종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임금에게 진상하는 풍경이 담겨 있다. 이 시기 관에서는 봉진의 수량을 충당하기 위해 일반 민가의 귤나무 하나하나를 일일이 관리했다. 그리고 해충이나 바람에 의해 떨어진 귤까지도 백성에게 책임을 물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뜨거운 물을 부어 일부러 귤나무를 죽게까지 했겠나. 착취도 이런 착취가 없다. 귤이든 전복이든, 모든 제주의 것에는 제주의 눈물이 서리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감귤박물관을 나와 다시 쇠소깍으로 향했으나, 결국 테우체험은 하지 못했다. 정해진 배 시간이 있는데 그걸 놓쳐버린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돌멩이에 담아 힘껏 바다에 던지며 놀다가 그냥 돌아왔다.
물수제비라도 근사하게 뜨면 좋을텐데 말이야.
오후 5시 27분의 풍경
저녁에는 어김없이 온 가족 노래자랑이 열렸다. <개구리노총각>을 시작으로 동욱이가 무척 좋아하는 김경호 아저씨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까지, 각종 악기 소리도 입으로 흉내 내며 신 나게 불러댔다. <개구리노총각>은 요즘 어린이집에서 배운다며 선생님이 문자로 알려준 노래다. 어린이집에서 배우는 노래를 엄마, 아빠가 가르쳐주고 있으니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이렇게 키우며 홈스쿨링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물론 어림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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