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올레길 7코스, 변방의 역사를 위하여
오늘, 드디어 올레길을 걷는다. 제주에 온 지 보름 만에 그 유명한 올레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더 일찍부터, 더 많은 올레길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아직 애들이 어려 걷는 일정을 최소화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오늘 이 녀석들이 잘 걸어줘야 할 텐데, 일단 컨디션은 좋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면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는다.
양치질을 하는 건지, 칫솔을 씹어 먹는 건지.
오늘 우리가 걸을 올레길은 7코스. 외돌개에서 돔베낭굴, 수로봉, 법환포구, 강정포구, 월평까지 이어진 길이다. 대략 15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4~5시간 걸린다. 물론 애들이 이 거리를 다 걸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최대한 걷다 빠지고, 차로 이동해 또 걷다가 빠지는, 이를테면 '치고빠지는' 전략으로 걸어 볼 작정이다.
외돌개는 주차장에 내려 바닷가 쪽으로 난 작은 계단 길을 걸어 조금만 내려가면 나온다. 바다 한가운데 홀로 외롭게 솟아 외돌개라는데, 실은 외돌개보다 그 뒤로 탁 트인 바다가 더 외로워 보인다.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한 장 찍고, 이 바다에 마음껏 취해보리라 다짐하며 얼른 걸음을 재촉하는데, 애들이 그만 걷자고 퍼져버린다. 이제 겨우 250미터 왔는데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포기할 수밖에. 우리는 그곳에서 '쭈쭈바'를 먹으면서 좀 쉬다가 첫 번째 '치고빠지는' 올레길 걷기를 마쳤다.
동호 좀 봐. 뚱해서 엄마 찌찌 만지고 있네. 벌써부터 힘들었던 거지.
외돌개 너머 탁 트인 바다
'쭈쭈바'를 향한 갈망. 바다고 뭐고 다 필요없어!
다시 차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 돔베낭굴 입구에 이르렀다. 그 짧은 시간에 동호는 곯아떨어졌고, 동욱이만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여기서부터는 기암절벽과 바다가 만나는 해안길이라 동욱이가 걷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올라오니 관광버스가 잔뜩 몰려온다. 아까 외돌개에서도 본 듯한 관광버스들이다. 울긋불긋한 등산복과 워킹화에 마스크까지, 제각각 차려입었지만 이건 분명히 유니폼이다. 이들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니, 어이구! 어서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버스들은 오늘 온종일 우리와 동선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근처 수모르공원에서 간단하게 떡볶이를 해먹고 다시 길을 나선 곳은 바로 법환포구. 뒤로 한라산에 기댄 채, 바다 멀리 범섬, 문섬, 섶섬을 바라보고 있는 법환포구는 영화 <홍반장>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동네 아주머니는 용천수에서 빨래를 빨고 아이들은 바닷물에서 다이빙하며 노는 모습을 보니, 이런 게 마을이구나 싶었다.
용천수에서 빨래도 하고.
여긴 목욕탕.
형아들이 다이빙하는 모습이 신기한지 동욱이 동호가 한참을 바라보네
용천수는 지하수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로 솟아나는 물로 제주도에서는 생명수나 다름없다. 식수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목욕이나 빨래 등 일상적인 생활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용천수는 대개 해안지대에서 발달하는데, 이는 해안가가 압력이 가장 낮기 때문이다. 땅의 압력과 바다의 압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에서 용천수가 솟는 것이다. 제주도에서 마을이 해안을 따라 늘어선 이유도 용천수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해안도로 개발 등으로 이 용천수가 많이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상수도 시설이 잘 발달해 용천수가 더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한라산에서 형성된 지하수가 해안가 용천수로 솟아오르기 위해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흘러내린다고 하니, 이 용천수야말로 제주도 전체를 적시고 살리는 핏줄 같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법환포구에 들어서면 용천수와 함께 눈에 띄는 게 바로 막숙이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장군이 이곳에서 목호군을 궤멸시켜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다며 비석까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전투를 단순히 중앙정부의 자주적인 입장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제주는 직속령으로 편입된다. 원은 제주에서 직영목마장을 세웠고, 목호는 이를 관리하는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다. 대략 1,700여 명에 이르렀다는 이들 목호는 이후 100년 동안 제주도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제주인들과 결합할 수 있었다. 그사이 제주의 경제력은 성장했고, 무엇보다 목호와 제주 여성과의 혼인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그러므로 목호는 단순히 외세로만 볼 수 없다. 3천 명의 목호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려 2만 5천 명의 대군이 동원되었음에도, 한 달 이상 전투가 지속하였다는 사실도 목호군과 제주인의 강력한 결합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제주인에게 최영장군은 민족을 독립한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죽인 학살자가 되는 셈이다.
이렇듯 변방의 눈으로 본 역사는 중앙정부의 해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는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힘있는 자들이 저지른 모든 전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학살과 침략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변방의 역사는 결코 잊히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진실이 거짓과 위선에 포로가 되어 어둠이 장막 속에서 신음하더라도, 결국 최후의 승자는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다만, 진실을 구하는 시간이 필요하듯 변방의 역사도 그것을 밝히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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