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물 우이 삼 년 물 아래 삼 년' (우도)
동욱이가 이불에 오줌을 쌌다. 위아래 옷이며 깔고 자는 요까지 흠뻑 젖었다. 원래 쉬를 잘 가렸는데 많이 피곤했나 보다. 녀석, 얼마나 민망할까. 어렸을 때 이불에 오줌 싸고 새벽에 깨서 "엄마, 나 오줌 쌌어"라는 말이 입가에서만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후다닥 옷과 이불을 빨아서 널었는데, 다행히 아침부터 볕이 좋아 금방 마른다.
오늘은 돈내코에서 철수하는 날이다. 아침 먹고 오전 내내 짐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동호가 아빠에게 안 떨어진다. 뭐가 성에 안 찼는지, 하필 오늘 같은 날 계속 칭얼대고 운다. 그러다 짐을 다 싸고 차가 출발하자 바로 곯아떨어진다. 가엽다.
아이의 욕구 불만은 대체로 어른 탓이다. 엄마, 아빠가 모두 짐을 싸느라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데, 오죽 심심하고 관심을 받고 싶었겠나.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징징거리는지 화딱지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 아이의 처지에 먼저 공감해야 아이도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믿고 기다려주는 만큼, 딱 그만큼 아이들은 자란다.
오늘은 우도로 간다. 성산항에서 배 타고 15분. 그 짧은 순간에도 조류가 강해 배가 휘청휘청한다. 제주도의 창세여신 설문대할망의 거센 오줌발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우도는 설문대할망의 오줌발로 땅이 떨어져 나가 생긴 섬이다.
우도 앞바다는 짙고 밀도가 높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탄성이 터진다. 돌고래다! 돌고래 무리가 물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우와! 대단하다. 최근 돌고래 무리가 자주 출연한다더니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돌고래가 나타난다는 것은 제주도 바다가 점점 뜨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양생태계의 혼란은 물론, 해수면 상승 등 온갖 기후변화의 악영향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돌고래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는 것보다 제주도 난대성 토종 어종인 자리돔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도에 도착해 제일 먼저 서빈백사를 찾았다. 10여 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하얀 모래밭의 눈부신 바다를 떠올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여느 관광지나 다름없는 북적대는 해변이다. 관광객을 실은 셔틀버스도 연신 왔다갔다한다. 그리고 "우도에서 골프카트 및 전기자동차를 임대 운영하는 것은 불법입니다"라는 현수막까지.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지 실망도 크다.
우도에서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은 서빈백사, 하고수동해변, 비양도, 이렇게 세 곳. 어디가 좋을지 일단 둘러보기로 하고 섬 한 바퀴를 돌았다. 서빈백사는 사람이 너무 많고, 하고수동해변은 아이들 놀기는 좋지만 바람이 너무 세다. 비양도 역시 경치는 좋지만, 바람이 장난 아니다. 어쩌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텐트 치는 건 포기하고 하고수동해변 근처에 민박을 잡았다.
우도에서 본 제주도. 제주도가 오름의 섬이란 걸 알 수 있다
하고수동해변에서 한 컷
비양도에서도 한 컷. 엄마랑 동호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민박은 할머니 혼자 사시는 낡고 허름한 바닷가 집이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 방과 우리 방이 있다. 애들은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 논다. 텔레비전이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애들이 할머니와 거리낌 없이 지내니 좋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를 싫어했던 것 같다. 뭉뚱그려진 기억이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기억은 또렷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고개를 떨구시던 아버지 모습이다.
고무 대야 두 개면 충분해 ^^
민박집 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라고 하셨다. 젊어서는 객지로 나가 결혼도 하셨지만, 결국 혼자 몸으로 다시 이곳으로 오셨단다. 자식들이 제주시와 부산에 살고 있는데, 부담되기 싫어 여기서 혼자 사신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는 잠녀옷이 걸려 있다. (해녀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건너 온 말이고 애초에는 잠녀, 잠수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즘도 물질을 하시냐고 묻자, 요새 젊은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나이는 다 한다고 하신다. 할머니에게 물질은 선택 가능한 직업이 아니라 그냥 삶의 일부라고. '물 우이 삼 년 물 아래 삼 년'이라는 제주도 속담은 거저 생긴 게 아니었다.
잠녀옷은 두꺼운 고무 옷이다. 그래서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할 수 있다. 또 부력이 좋아 위급한 상황에서 쉽게 물 위로 떠오를 수 있다. 처음에는 그냥 알몸으로 물질했는데, 그것이 금지되면서 무명 저고리에 흰 수건으로, 그리고 지금의 검은 고무 옷으로 변해 왔다. 그럼에도, 저 두꺼운 고무 옷을 뒤집어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춥고 무섭고 외로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한다는 물질. 제주도 여성들에게 바다는 생존의 터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오늘 밤 바닷소리가 유난히 크다.
우도 밤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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