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자투리의 진가가 널리 발휘되는 날이 오기를
아침부터 애들이 놀이터에서 논다. 엄마, 아빠 없이 스스로 노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이만하면 그저께 텐트를 통째로 들어 이곳으로 옮긴 보람이 있다. 그런데 이 놀이터는 다 좋은데 주변에 큰 돌이 너무 많다. 아직 걸음마가 서툰 동호가 혼자 걸어가기엔 좀 어렵다. 그래서 내가 동욱이한테 동호 손 좀 잡고 가라고 하니, 정말 그렇게 한다.
그뿐만 아니다. 놀이터에 있는 미끄럼틀을 타려면 계단으로 올라가 흔들다리와 외나무다리를 차례대로 건너야 하는데 동호가 무서워하자 동욱이가 용기를 준다. "동호야, 용감하게 가야 해! 열 발만 더 가면 돼. 세 발만!" 기특한 놈, 다 컸다니까.
보통 첫째 아이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책임감이 크다고 한다. 지금 동욱이가 딱 그렇다. 많이 싸우는 와중에 가끔 동생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기도 하지만, 동호 때문에 생긴 상실감과 강요된 책임감이 얼마나 클까 하고 생각하면 괜히 안쓰럽다. 첫째 아이 특성, 둘째 아이 특성, 뭐 그런 거 없이 키우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10시 30분, 오늘은 모두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며 출동했다. 저지예술인마을과 설록차박물관, 세계자동차박물관까지, 조금 빡빡한데다 죄다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일정이라 애들이 어떨지 모르겠다. 암튼 출발은 힘차게!
휴양림을 떠나 기분 좋게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동욱이가 묻는다. "아빠, 저기 저 깃발은 뭐야?" 자세히 보니 길가에 골프대회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동욱이가 좋아하는 공놀이는 분명한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제주도관광안내지도를 펼치면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게 바로 골프장이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제주도에는 서른 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다고 한다. 그 면적도 제주도의 2.2%. 더 큰 문제는 이들 골프장이 제주도 생태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간산과 곶자왈 지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도가 사라지고 골프장이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중산간과 곶자왈을 살릴 것인지, 골프장을 지을 것인지, 답이 분명한 이 문제를 왜 풀지 못하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오늘의 첫 목적지인 저지예술인문화마을은 정부가 지역특색화 사업으로 조성한 마을이다. 제주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여기에 각종 예술인이 입주해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마을이라기보다는 꼭 공원 같다. 멋들어진 집들과 조경이 산책하며 구경하기엔 좋지만, 각각의 집들이 개방적이지 않아 그 안에서 무슨 예술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게 무슨 예술마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비단 예술가의 사적인 공간을 넘어, 그 예술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적인 의미로써 마을이 필요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손 꼭 잡고 걸어가는 거 봐. ㅋㅋ
저지예술인마을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저지리에 있는 작고 허름한 가게인데 자투리 고기연탄 구이로 꽤 유명한 맛집이다. 자투리 고기라니 과연 어떤 맛일지, 배도 고프고 기대가 컸다.
허름한 명리동식당
우리가 도착했을 땐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비교적 한산했다. 애들 때문에 편하게 먹으려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인아저씨가 홀로 안내한다. 방은 연탄구이가 아니라서 자리가 있다면 홀에서 먹어야 한단다. 그런데 홀에 있는 의자에는 등받이가 없다. 애들이 편하게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맛있길래 이를 감수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그렇게 했다.
연탄불에 얹혀진 멜젓이 보글보글 끓을 때쯤, 고기도 노릇하게 구워졌다. 고기 하나를 집어 멜젓에 찍어 먹었다. 그런데 마치 회처럼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게 아닌가. 명불허전이란 이런 거구나. 제주도 고깃집 중 단연 최고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자투리 생고기
연탄구이나 숯불구이가 맛있는 이유는 단지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데, 바로 열전달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열심히 배운 것처럼 열의 전달 방식에는 전도, 대류, 복사, 이렇게 3가지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용하는 가스 불은 분자를 통해 열이 전달되는 대류 방식으로 음식을 익힌다. 반면 연탄불이나 숯불은 열이 직접 전달되는 복사 방식이다. 그래서 열의 이동 속도도 빠르고 양도 많다. 순식간에 열이 고기 속까지 전달되어 육즙을 잡아 주는 것이다. 이 육즙 맛을 보기 위해 자식들을 불편하게 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먹어본 자는 이해 할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단 걸 말이다. 그러니 얘들아, 부디 이 아빠를 용서하거라.
자투리 고기는 우리가 흔히 먹는 삼겹살, 목살, 안심, 등심 등을 빼고 남은 부위를 말한다.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는 자투리가 이렇게 훌륭하게 탄생할 수 있다니 놀랍다. 하긴 애초 한몸이었으니 자투리라고 뭐 부족한 게 있을까 싶다. 오히려 필요하지 않다고 버려지는 게 잘못이다. 자투리 고기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되고, 자투리 목재가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변하고, 자투리 종이가 멋진 명함이 될 수 있다면, 자투리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창조체인 셈이다. 음식이나 사물도 자투리가 이렇게 귀한데,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나.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버려지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어야 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야만적인 상황이 아닌지. 하루빨리 자투리의 진가가 널리 발휘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다음은 설록차박물관. 제주도에는 각종 박물관이 많은데 이렇게 성공한 박물관이 또 있을까 싶다. 다습하고 일교차가 크며 자갈이 많은 한라산 중턱이 녹차 재배에 적격인 점도 작용했을 테고. 무엇보다 푸른 녹차 밭이 주는 시원하고 상쾌한 기운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업이 자신의 제품을 숨김없이 홍보하고 판매하는 곳임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넘쳐날 수밖에. 동욱이랑 동호도 녹차 밭을 보자마자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그리고 신이 나서 녹차 밭을 헤집고 다니며 숨바꼭질 놀이에 빠져든다.
나 여기 있지롱!
앗싸!
엄마는 여기 있지롱!
우리가 오늘 마지막으로 간 곳은 자동차박물관이다. 처음부터 썩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동욱이가 차를 좋아해서 한 번 가보기로 한 곳이다. 그런데 예상대로 비싸기만 하고 별로였다. 동욱이가 여러 가지 형태의 자동차를 보고 신기해했단 점, 그리고 직접 모형자동차를 운전해 봤단 점 정도가 의미 있었달까. 암튼, 관광책자 쿠폰으로 할인받았다는 것을 억지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박물관을 나와서는 중문으로 향했다. 거기서 목욕도 하고 저녁도 먹었다. 오랜만에 때 빼고 광도 내니 꾀죄죄한 얼굴들이 반질반질 빛났다. 비록 행색은 초라하고 촌스러웠지만, 얼굴에는 깨끗한 웃음이 가득했다. 제주도 여행 11일째, 어느덧 우리는 도시생활의 태를 말끔하게 벗어내고 제주유랑가족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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