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못살포’에서 만난 태양 같은 바다
아침에 텐트 안에서 우유를 쏟았다. 동욱이는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며 "그러니까 조금만 따랐어야지!"라며 타박을 준다. 이럴 때 보면 꼭 애늙은이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날을 텐트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고약한 냄새라도 베면 고달픈 일이다. 그래서 얼른 이불을 닦아내고 빨랫줄에 묶어 널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내가 설거지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울상이 되어 있었다. 휴양림 관리인이 당장 치우라고, 텐트를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큰소리치고 갔단다. 그런데 내가 없어 무서웠다고. 나는 부랴부랴 짐을 정리하고 관리사무소로 가서 따져 물었다. 조금 전에 다녀간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강제 철거 운운하며 협박하는 거냐고 말이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연박이 안 되니 9시 전에는 짐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전해 들은 바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로 협박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강하게 따졌다.
사실 내가 이렇게 강하게 항의한 건 조금 오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얻은 일종의 비결(?)랄까. 아내는 늘 공정한 척 심판하거나 무심하게 논평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내는 어떤 상황에서건 우선 자기 마음에 공감해주고 자기편이 되어주길 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다. 내가 어떤 경우에도 자기편이란 걸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만약 여기 운영 원칙이 그래서 그런 거래, 저쪽은 많은 사람을 대하는 거니 우리가 이해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 대처했다간 남은 여행이 아주 고달팠을 것이다. 물론 아내가 겁에 질릴 정도였으니,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일은 분명했다. 그냥 아주 조금, 쪼금 그랬다는 거다. 내 마음 알지, 여보야? ^^;;
오늘은 제주도 서쪽 고산리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남쪽 서귀포까지 달리는 일정이다. 고산리에 도착하니 제주도에서 가장 큰 무인도라는 차귀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배낚시가 유명하고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한치 3마리를 사서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얼마 가지 않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적지인 고산리선사유적지가 있다기에 잠깐 들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유적지가 있다는 표지판만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일과리를 지나 모슬포항에 도착하니 토요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갖가지 먹거리는 물론이고 노래자랑까지 열리는 장터였다. 그런데 전통장터라기 보다 약간 이벤트 행사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점심으로 우럭조림을 먹었다. 역시 항구 안쪽에 자리 잡은 허름한 식당이었는데 맛이 최고다.
모슬포항에서. 잘 뛴다, 우리 동호!
점심을 먹고 다시 해안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와! 언덕을 하나 넘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아마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면 이 멋진 광경을 놓쳤을 것이 분명하다!) 난데없이 불쑥 솟아오른 산방산과 확 트인 바다, 그 사이에서 굽이굽이 감도는 검은 해안과 쉴새 없이 넘실대는 하얀 파도가 한데 어울려 장관을 연출한다. 월정리 바다가 세상을 감싸는 달을 닮은 바다라면, 이곳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킬 거센 태양과 같은 바다였다.
바다와 땅이 이렇게 오묘하고 멋드러지게 만나는 곳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세기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모슬포는 '못살포'라고 불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한 곳도 바로 이 지역이다. 기괴하기로 유명한 추사체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곳의 혹독한 날씨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내가 제주도에서 본 바다 중에서 넘버 쓰리 안에 드는 멋진 곳이다.
산방산 아래 작은 카페에서 애플파이를 먹고 있는 동욱이랑 동호. 역시 먹는 건 동호 중심이다. ^^::
산방산을 지나면 화순금모래해변이 나온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해변인데, 오늘은 이곳에서 모래 놀이를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분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맨살을 따갑게 때릴 정도다. 결국, 모래 놀이는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철수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놀다가 산방산 근처로 다시 돌아가 밀면과 수육이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모래 놀이가 무산되면서 30분을 더 달려 중문색달해변까지 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식당은 저녁 6시까지만 영업을 하는데,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결국, 또다시 폭풍검색에 나섰고 우리는 제주향토음식전문점이라고 검색된 한 식당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영 꽝이다. 식당은 엄청 크고 으리으리한데 값만 비싸고 맛은 별로였다. 역시 관광지의 이런 큰 식당보다는 약간 외지고 허름해도 현지인들이 더 많이 식당이 더 맛있는 법이다.
텐트로 돌아와 애들 눕히고 아내와 제주막거리를 한 잔씩 마셨다. 원래 술은 잘 못하는데, 애들 재우고 껌껌한 텐트 안에서 작은 렌턴 하나 밝히고 마시는 술 한 잔은 정말 달짝지근하다. 얼근한 취기가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피로도 적당하게 풀어준다. 그나저나 오늘은 동욱이가 아침부터 모래 놀이 가자고 노래를 불렀는데 아쉽다. 내일은 기필코 모래 놀이를 하고 말 테다, 다짐하며 동욱이를 꼭 끌어안고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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