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4일]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만나다 (비자림)
후드득후드득 빗소리에 잠이 깬다. 비가 와서 걱정이지만,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어찌나 생동감 넘치는지 정신이 맑아진다. 한껏 당겨져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흩어지고 다시 떨어져 또르르 구른다. 하늘 위의 불꽃놀이처럼 텐트 위에서 물꽃놀이가 펼쳐진다.
오늘 갈 곳은 비자림,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에 있는 비자나무 군락지다. 모두 2,800여 그루가 있다는데 단일 품종 군락으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맨 처음 벼락 맞은 비자나무가 나온다. 벼락은 구름과 땅 사이에서 발생하는 방전 현상인데, 폭우로 습기가 많아지면 공기층의 전도성이 높아져 벼락이 내리게 된다. 대개 뾰족한 부분에 많이 내려 벼락 맞은 나무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 나무는 벼락을 맞고도 살았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길 수밖에. 벼락 맞은 나무를 만지면 피부병이 낫는다고 한다.
연리지.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하나가 되었다
벼락 맞은 비자나무를 지나 30여 분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수명이 825년인 비자나무도 나온다. 이름은 새천년비자나무. 울창한 비자나무 숲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영혼의 나무 '에이와나무'같은 느낌이다. 비자나무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것은 음지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내음성이 강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대신 아주 천천히 자란다. 속도를 내주고 생명을 얻은 셈이다.
새천년비자나무. 키가 14미터에 수관폭은 15미터나 된다
새천년비자나무를 반환점 삼아 돌아오면 비자나무 우물이 나온다. 옛날 비자나무 숲 지킴이 산감이 먹었던 물이란다. 물이 귀한 제주도지만, 이곳만큼은 수많은 비자나무들의 뿌리가 물을 머금고 조금씩 흘려보내 항상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비자나무의 잔뿌리가 정수 기능을 해 물이 맑다고. 그러니 자연이야말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진정한 의미의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이렇게 한 바퀴 돌면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우리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애들과 움직이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동호는 요즘 혼자 하려는 게 부쩍 많아지면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늘었다. 유모차 벨트 매는 것 하나에도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끝까지 기다리고 응원하는 것 말고는 별수가 없다.
비자림에서 나오는 길에 동욱이가 무덤을 가리킨다. 제주도에는 무덤이 흔한데, 특이한 것은 밭 한가운데 돌담으로 둘러싸인 무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산담이라고 한다. 소나 말이 무덤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 봉분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산담을 만들었다. 또 농부들은 산담 안에서 밥도 먹고 농기구를 보관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제주가 바로 그곳이다.
생존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오후에는 성산 읍내로 나가 병원을 찾았다. 동욱이가 고추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제주에서 한 달간 캠핑하면서 지낸다며 혹시 잘 씻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를 미개인처럼 쳐다본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다니는 게 뭐가 그렇게 좋으냐면서 말이다.
물론 동욱이가 아픈 건 나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의사의 말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다. 도대체 깨끗하다는 것, 청결이란 무엇인지. 지나친 청결이 아토피성 피부염과 천식의 원인이란 의학적 주장도 있고 청결과 편리함을 강조하는 일회용 생리대가 여성 질병의 원인이란 주장도 있지 않나. 어찌 보면 청결이란 현대 물질문명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르겠다. 청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상품을 소비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건강한 삶이 곧 청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야영장으로 돌아오니 다시 비가 내린다. 애들 재우고 텐트 안에서 후드득 물꽃놀이 소리를 듣고 있으니 오늘 하루 시작과 끝이 연결된 느낌이다. 제주도에 내려온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4일이다. 이제 곧 이 여행도 끝이 나겠지. 동욱이가 빨리 낫기를 바라며 내일 하루도 열심히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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