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상상의 섬, 이어도의 비밀 (김영갑갤러리, 세화오일장)
밤새 빗줄기는 굵어져 아침까지 이어진다. 텐트 안에서 뒹굴며 잘 놀던 아이들은 어느새 지겨워졌는지 아침을 먹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간다. 동호는 손이며 발이며 할 것 없이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논다. 얼른 씻기고 챙겨 김영갑갤러리로 향한다.
성산읍 삼달리에 있는 김영갑갤러리는 폐교였던 삼달분교를 다시 고쳐 만든 미술관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갖가지 나무와 꽃, 그리고 조각물로 이뤄진 정원이 나온다. 그곳에서 비를 머금은 땅과 꽃, 풀, 돌이 더욱 짖게 자기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는, 한가지 색으로 세상을 덮어버리는 눈과 달리, 자신의 색을 찾아준다. 그래서 비가 좋다.
미술관 정원에서 놀고 있는 조동호
김영갑은 제주의 외로움과 평화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예술가이다. 1985년 이 섬에 정착한 이후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그러던 중 루게릭병을 진단받았지만, 김영갑은 셔터 누르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몸소 갤러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영갑갤러리가 2002년 문을 열었고, 김영갑은 투병 생활 6년 만에 이곳에서 고이 잠들었다.
"우리가 항상 유토피아적 삶을 꿈꾸듯 제주인들은 수천 년 동안 상상 속의 섬 이어도를 꿈꾸어 왔다. 제주를 지켜온 이 땅의 토박이들은,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상적 삶에 절약, 성실, 절제, 인내, 양보가 보태져야 함을 행동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나(제주)다움을 지키지 못한다면 꿈은, 영원히 꿈에 머문다. 제주인들처럼 먼저 행동으로 실천할 때 이어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김영갑갤러리에 걸린 김영갑의 말이다. 김영갑은 제주도의 산과 들과 바다를 찍으면서 제주인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주도의 풍경만큼이나 그 삶의 흔적도 다채로웠다. 어쩌면 상상의 섬 이어도는 다름 아닌 제주도 그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김영갑은 삶의 고단함이 만들어낸 외로움과 평화를 동경했고, 끝내 그것과 하나가 되었다.
"육신의 움직임이 둔해져 하루가 느리고 지루하다. 일상은 단순하고 탄력이 없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하늘이다. 풀과 나무가 내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는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다.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주저 없이 자신을 자연에 내맡겼다."
김영갑갤러리에서 나와 다시 성산읍으로 가기 위해 삼달리부터 성산읍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렸다. 며칠 전 높은 파도와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는 흐리멍덩한 하늘처럼 고요하게 변해 있었다. 바다는 하늘을 닮는 법이다.
오늘 바다가 쓸쓸하다
성산일출봉을 뒤로, 외로운 의자 하나
성산일출봉 입구 경미휴게소에서 해물라면을 먹었다. 말이 휴게소지 식당이다. 나름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데, 무늬만 해물이 아니라 진짜 해물이 들어간 라면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이쯤 되면 해물라면이 아니라, 라면 사리가 들어간 해물탕이라고 해야 맞다.
작고 평범한 식당이지만, 정말 많은 사람의 손길을 닿은 곳이다
성산일출봉은 산밑까지 유명 커피전문점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세계7대경관' 선정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자본에 포섭되고 요란한 선전만 난무하는 관광 정책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 '세계7대자연경관'이라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기투표로 순위 매김하겠다는 발상부터 문제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 선정되려고 쓴 전화비용만 수백억이라고 하니, 정부가 국제적인 보이스피싱 사기에 걸려든 건 아닌지, 한심하고 부끄럽다.
서둘러 성산일출봉을 빠져나와 근처 방듸카페에서 커피가루를 사 들고 세화오일장으로 향한다.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세화오일장은 5일과 10일마다 열리는데,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있어 경치가 정말 좋다. 게다가 활짝 갠 날씨까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깊이에 따라, 바다 밑 모습에 따라, 햇볕이 닿는 위치에 따라 사파이어에서 에메랄드까지 온갖 보석이 한데 어우러진 느낌이다. 세화오일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장이다.
정말 근사한 바다지?
조동호 브이
도저히 장만 보고 그냥 갈 수 없어 동욱이랑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동욱이도 바다라면 언제나 오케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바닷가에서 놀고 먹고 즐기며 예정에도 없는 시간을 보냈다. 발길 닿는 곳으로 흐르다 마음 닿는 곳에서 멈춰 놀고, 이보다 멋진 여행이 어디 또 있을까.
열심히 뛰어 다니는 조동욱
물질 나가는 잠녀. 얼마나 외롭고 두려울까.
저녁 늦게 모구리야영장으로 돌아오니 석가탄신일이 낀 황금연휴를 맞아 캠핑을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약간 짜증스러웠을 텐데, 오늘만큼은 마음이 여유롭다. 하루를 잘 보낸 탓이겠지. 밤늦게까지 김영갑의 중산간 사진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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