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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20 [5월 8일] 달이 머무는 바다 (월정리)
제주유랑가족2012. 8. 20. 21:29

[5월 8일] 달이 머무는 바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그래도 온몸이 쑤신다. 일주일의 긴장과 피곤이 몸에서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다행히 동욱이는 텔레비전 앞에서 만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문제는 동호, 아빠가 일어나자마자 안아 달라고 착 달라붙는다. 아, 무거운 놈.

 

얼른 아침밥 해 먹고 바닷가로 나갔다. 월정리(月汀里)는 달이 머무는 바다다. 제주도의 크고 이름난 해수욕장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강렬한 존재는 아니지만, 깊고 아늑하며 고요하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 한적한 바람이 한데 모여 눈과 발, 마음을 치유한다.

 

 

 

월정리 바닷가의 화룡점정은 ‘고래가 될 cafe’다. 원래 그 자리에는 '아일랜드 조르바‘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이게 옆 동네 평대리로 자리를 옮기고 ’고래가 될 cafe'가 들어섰다.

 

‘고래가 될 cafe'는 바다로 열린 카페다. 낡은 테이블과 의자들은 카페를 뛰쳐나와 작은 도로를 건너 바로 바다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사랑을 나눈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맘껏 뛰고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자연 속 키즈카페가 바로 여기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인가 보다. 동욱이는 그림 그려 달라, 동호는 안아 달라, 득달같이 아빠에게 달려든다. 엄마는 예전 직장에서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퇴직했으면 끝이지 왜 아직 업무 전화로 남편을 고통받게 하는지, 고약한 심보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돌아오자 동호는 엄마 품에 안겨 바로 잠이 들었다. 동욱이는 엄마 옆에서 그림을 한두 장 그리더니 이내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모래 놀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귤꽃소복샤르르라떼’를 한 잔 마신다. 달짝지근한 라떼 한 모금에 온 세상이 평온해진다.

 

 

 

 

 

 

오늘 동욱이 모래놀이 주제는 화산이다. 동욱이는 “딩동딩동~ 화산이 열렸다~”라며 연신 노래를 불러대며 모래를 쌓아 높은 산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펑”하고 터트린다. 그렇게 몇 번 터진 화산은 이내 논과 밭으로 변했다. 자신을 미역농부로 소개한 동욱이는 바닷가에 떠내려 온 해초를 모아 모래사장에 심었다. 미역농부의 얼굴을 보니 올해도 풍년이다.

 

 

 

저녁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흑돼지 삼겹살을 사왔다. 제주도에서는 돼지고기를 멜젓(멸치젓)에 찍어 먹는다. 종지에 담아 고기와 함께 석쇠 위에서 보글보글 끓인 멜젓은 느끼한 고기 맛에 감칠맛을 돌게 하며 끝 맛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는 환상의 궁합이다.

 

제주도 토종 흑돼지를 흔히 ‘똥돼지’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마다 변소에 돌담을 쌓아 ‘돗통’을 만들고 그 안에서 돼지를 키웠다. 그러다 관광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톳통’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자연순환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똥을 돼지가 먹고, 그 돼지의 똥을 땅이 먹고 또 그 땅에서 자란 곡식을 인간이 다시 먹는 것이다.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없애버렸지만, 제주도 ‘돗통’만큼 깨끗하고 친환경적인 시스템이 또 있을까 싶다. 정작 우리가 더럽고 야만적인 시대로 후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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