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해변의 새로운 배이스캠프
[5월 6일] 오늘 밤은 폭낭이 될 수밖에
관음사야영장 5일째, 오늘 베이스캠프를 옮기기로 했다. 애초 우리가 찜을 해둔 야영장은 관음사야영장, 서귀포자연휴양림, 돈내코야영장, 모구리야영장, 이렇게 네 곳이다. 대략 대엿새 주기로 베이스캠프를 옮기고 때때로 민박과 바닷가 야영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김녕성세기해변에서 하루 지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제주시에 사는 아내의 선배 집에 잠깐 들렀다. 서울에 살다가 몇 해 전 제주도로 내려와 정착한 집이다. 제주 이민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거침없이 제주이민>이란 책에 ‘불꽃 아빠 뽀뇨의 프리랜서 일기’란 꼭지로 실리기도 했다. 온 가족이 거지꼴을 하고 찾아가 밥도 얻어먹으랴, 여행정보도 얻으랴,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으나 꽤 부러웠다. 아이들 키우면서 언제나 마음 한구석엔 시골로 내려갈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아이들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면서 키우긴 정말 싫다. 그럼에도 섣불리 시골로 내려가지 못하는 건 도시생활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독특하게 전세가 거의 없고 ‘년세’란 게 있다. 부동산 매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집은 말 그대로 사는(living) 집이다. 싫든 좋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집이다. 자기 집이 있고 버는 만큼 쓴다. 그래서 남자는 대개 삶이 치열하지 않다. 술 먹고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즐긴다. 윷놀이에 한 판에 천만 원씩 돈이 걸린다. 물론 여자는 다르다. 물질이면 물질, 밭일이면 밭일, 일 년 365일 쉴 날이 없다.
김녕성세기해변은 제주시에서 1132번 일주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야 한다. 중간에 ‘조천-함덕 해안도로’로 빠지면 함덕서우봉해변이 나온다. 잘 알려진 해수욕장이지만, 관광지 분위기가 너무 강하다. 마치 태국의 어딘가에 있을 휴양지 같은 느낌이다.
반면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김녕성세기해변은 다르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사장, 해안도로를 따라 서 있는 풍력 발전기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고 고요하다. 게다가 바다 바로 옆으로 넓은 잔디밭의 야영장이 있다. 아직 정식으로 개장을 안 해 물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지만, 여유로운 바닷가 야영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천혜의 장소였다.
김녕바다, 아름답다.
바다를 보고 있는 우리 집
황송하게도 온통 꽃이다.
텐트 설치하고 바닷가 한번 갔다 오니 금방 해가 저문다. 사람들이 물러난 바닷가의 밤은 바람이 주인이다. 허락 없이 영역을 침범한 우리를 혼내기라도 하듯 밤새 우리 텐트를 흔들어댄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우리 집이 날아가는 건 아닌지, 무서워서 잠을 이룰 수 없다. 이런 상황은 꿈꿨던 야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하여튼 겁은 많아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훌륭한 조명이 된다.
제주도 바람은 무섭고 섬뜩하다. 따뜻한 날씨에도 변화무쌍한 바람으로 사람들의 삶은 척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아직도 바람신인 영등신을 모신다. 음력 2월 초하루에 영등환영제가, 2월 14일에 영등송별제가 열린다. 영등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왔는지, 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등등에 따라 한 해 운세도 달라진다고 한다. 미신일 뿐이지만, 바람으로 하룻밤 고생하니 절로 수긍이 간다.
폭낭도 바람이 만들어낸다. 폭낭은 바람을 타는 나무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엎드리는 풀잎처럼 폭낭도 바람으로 방향에 따라 제 몸의 방향을 바꾼다. 자연은 자연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 이 바람을 어쩔 수 없는 나로서도 오늘 밤만큼은 폭낭이 될 수밖에 없다.
제주도 어디선가 찍어 둔 폭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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