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 구럼비를 찾아서
아침부터 아이들이 게스트하우스가 떠나가라 뛰어다니며 논다. 잘 노는 건 좋은데 다른 손님들에게 눈치가 좀 보인다. 게스트하우스라 그런지 대개 손님들이 혼자 오거나 둘이 와서 조용히 지내기 때문이다. 가족여행으로는 게스트하우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이틀 동안 잘 쉬다 가니 일단 그걸로 됐다.
삼각대 없이 타임머로 사진 찍기란 참 어렵다. 몇 번을 찍었건만 이모양이다.
오늘은 올레길 7코스 마지막 지점인 강정마을로 간다. 강정마을은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이슈가 된 곳이다. 진작에 한번은 왔어야 할 곳인데, 이렇게 여행객으로 찾게 되니 괜한 죄책감에 마음이 무겁다.
마을 입구에 이르면 '해군기지 결사반대' 현수막이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그제야 여기가 강정마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 불과 몇미터 전만 해도 그저 평온한 제주도일 뿐이었는데. 순식간에 이 세상과 격리된 다른 세상으로 공간이동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백발의 신부가 군홧발에 짓밟히고 천혜의 자연유산이 포크레인에 무너져 내려도 세상은 미동도 없다. 바다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의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거리 평화센터 옆으로 평화바다 중덕 가는 길을 안내하는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따라가 보니 강정마을 평화활동가들의 식사터인 삼거리식당과 망루가 나온다. 바닷가는 공사장 펜스로 막혔고. 그 뒤편에는 구럼비바위가 있겠지. 비록 지금은 아무도 없이 서명용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지만, 이곳이야말로 구럼비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바람이 오롯이 남은 생명과 평화의 공간임이 분명하다.
동욱이가 뭘 봤을까.
엄마, 아빠가 이름을 쓰니 자기도 쓸 수 있다고 펜을 들었다. 조동욱이 유일하게 그릴 수 있는 글자.
다시 돌아 나와 강정포구로 가는 길, "저기 바다다."라고 외치던 아이들이 이내 "와, 저기 경찰이다."라고 외친다. 여기저기 경찰들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데, 경찰이 왜 있느냐는 동욱이의 물음엔 답조차 할 수 없다.
포구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 우리는 방파제 위를 걷기 시작했다. 해지고 찢긴, 하지만 '해군기지 결사반대'라는 글귀만은 분명한 노란 깃발들이 펄럭인다. 강정 바다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십자가가 서 있고, 그 너머 강정바다는. 대형 크레인과 포크레인으로 쉴 새 없이 파헤쳐진다. 이제는 그 누구의 기도도 소용없어진 것은 아닌지. 바람이 세다.
해군기지 결사반대.
생명과 평화를 향한 십자가.
파다는 평화로운데.
다시 마을 입구 쪽으로 나와 해군기지사업단 정문으로 이동했다. 군가가 울려 퍼지고, 해군이 정문을 지키고 있다. 주민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군대의 땅으로 변했다. 강정마을 주민의 입장에서 이곳은 육지의 군대가 주둔한 점령지다.
그 앞으로 할망물다방이 열린다. 평화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길바닥 다방으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과 따뜻한 차와 강정마을 소식을 나누는 곳이다. 거기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강정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욱이는 아빠 손잡고 앞서 가고, 동호는 엄마 손잡고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산책길이 끝나고 바닷가에 이르렀다. 강정천을 흐르던 물도 작은 폭포가 되어 바다로 떨어진다. 그곳에도 어김없이 경찰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그 뒤로는 공사장. 더는 구럼비에 갈 수 없다.
서귀포 식수의 70%를 공급하는 강정천. 은어가 뛰노는 1급수다.
구럼비는 강정마을 해안가의 고유지명이다. 1.2킬로미터에 이르는 바위 지대인데, 놀랍게도 이게 한 덩어리다. 할망물은 그 틈에서 솟아오르는 용천수. 강정마을 주민은 이 할망물로 토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아이 낳지 못하는 사람은 아이를 갖고, 아픈 아이는 병이 나았다. 구럼비와 할망물은 강정마을 주민에게 대대로 전해진 생명의 터전이었다.
정부는 지난 1992년부터 군사력 강화와 국가안보를 핑계로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목을 매 왔다. 하지만 화순마을, 위미마을 그리고 강정마을에 이르기까지, 돌아오는 것은 주민의 거센 반발뿐이었다.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는 일을 누가 쉽게 동의하겠나. 게다가 제주 해군기지는 동북아 평화를 위협한다.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정책인 미사일방어체제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제주에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미국과 중국의 군사적 대립은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여러모로 제주 해군기지 문제의 올바른 결론은 백지화뿐이다.
늦은 점심은 서귀포시에 있는 용이식당에서 해결했다. 역시 메뉴는 두루치기 하나뿐. 돼지고기에 파무침, 무생채, 그리고 콩나물까지 버무려져 매콤하게 입맛을 돋우웠다. 문제는 옷에 많이 튄다는 점, 반드시 앞치마를 둘러야 한다. 또 애들이 먹기 어려운 것도 문젠데, 지금까지 안 맵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만 찾아다녔으니 한 번쯤은 엄마, 아빠 입맛에 맞게 먹어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사실 나는 매운 음식을 잘 안 먹는 편이었는데, 아이들 때문에 그 맛이 원천봉쇄되니 오히려 매운 게 땅기는 순간이 왕왕 찾아왔다.
배불리 점심을 먹고 새로운 숙소인 돈내코야영장으로 향했다. 서귀포시 북쪽, 한라산 700미터 중턱에 자리 잡은 돈내코야영장은 멧돼지들이 물을 먹었던 입구란 뜻이다. 입장료는 무료. 역시나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우선 야영장을 휘 한 번 돌아보고 가장 명당자리라 생각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는 다섯 밤을 지내게 된다. 새롭게 마련한 집에서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마음 무거운 오늘을 뒤로하고 내일을 기다려 본다.
돈내코 우리집. 배산임수가 잘 맞았나 모르겠네.
조동호, 밥 먹다 말고 뭐가 저렇게 좋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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