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숲길, 숲길만큼이나 이름도 참 예쁘다. '산의 안'이란 뜻의 제주 고유어 '솔아니'가 변해 사려니가 됐다.
[5월 4일] 이놈들, 제주도를 잘 기억할 수 있을까?
오늘은 특별히 아이들을 위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내일은 어린이날, 어디든 인산인해로 빼곡히 들어찰 테니 오늘 즐기자는 거다. 그래서 정한 곳은 바로 에코랜드 테마파크. 기차를 타고 다니며 곶자왈을 체험할 수 있다는 곳이다. 이야말로 재미와 교육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부모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곳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계획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비싼데다 사람도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곶자왈을 테마파크로 꾸몄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는 애초부터 가당치 않은 조합이니까.
곶자왈은 숲은 뜻하는 ‘곶’과 수풀이 우거진 곳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진 제주 고유어로 나무와 덩굴, 암석이 뒤섞인 곳을 말한다. 화산폭발로 요철지형을 이뤄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해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생태공간이 바로 곶자왈이다. 지금은 한경∼안덕, 애월, 조천∼함덕, 구좌∼성산 등 네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면적으로는 제주도 전체의 6.1%에 불과한 이곳에 제주도 식물의 46%가 산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19세기까지만 해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곶자왈이 점점 축소되고 파괴된다는 점이다. 부지 헐값 매입, 환경영향평가 축소 등의 논란 속에서 건설된 에코랜드야말로 곶자왈 파괴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전체 곶자왈 면적의 60% 정도가 사유지라고 하니, 비극은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이 숲을 침투한 결과는 황량함뿐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점심은 교래리에 있는 닭칼국수집에서 해결했다. 물이 깨끗해 ‘삼다수’ 공장이 들어선 교래리는 마을 가로등이 닭 모양을 하고 있을 정도로 닭이 유명하다. 마을 입구부터 온통 백숙집과 닭칼국수집이다. 이곳은 주문을 받으면 그 때부터 면을 뽑기 시작하는데, 음식 나오기까지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기다림은 곧 양질의 음식으로 보상되었다. 대야 수준의 대접에 보기만 해도 쫀득한 메밀 면과 닭고기가 푸짐하게 어우러졌다. 무엇보다 뽀얀 국물, 완전 진하다. 칼국수가 아니라 삼계탕이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근처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사려니숲길 입구는 여러 곳인데, 우리는 1112번 국도에 있는 입구를 선택했다. 이 국도 양옆으로는 울창한 삼나무가 하늘을 찌르듯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그 길은 자동차의 속도를 낮추고 창문을 열어 손을 밖으로 뻗게 하는 마법의 힘을 가졌다. 그리고 결국 차를 멈춰 세웠고 우리 모두를 단잠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서야 깨어나 사려니숲길을 둘러볼 수 있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전야제, 우리는 밤늦게까지 놀기로 했다. 그래서 간 곳은 별빛누리공원. 망원경으로 직접 별과 행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천체투영실에서 별자리 영상을 보고 관측실로 가는데 동호가 칭얼거린다. 사람도 많고 시간도 늦어 피곤한가 보다. 그래서 동호는 엄마랑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동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관측실에는 모두 7대의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리까지 선명한 토성과 붉은 화성 등 망원경으로 바라 본 우주는 마치 컴퓨터 그래픽 같았다. 문제는 조동욱, 이놈이 잘 알고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영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옆에 달라붙어 저게 달이야, 저게 토성이야 하며 주입식으로 설명해 보려는데 뜻대로 안 된다. 그래, 나중에 기억하건 말건 지금 당장 재밌으면 됐지 뭐. 다행히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남들 하는 것처럼 망원경 렌즈를 쏘아보는 거 보니, 이 이상 뭘 더 바라겠냐 싶었다.
애초 제주도 여행 오면서도 그런 생각이었다. 애들이 너무 어려 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기 때문이다. 비록 동욱이 동호가 커서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하루 이 녀석들이 신 나게 뛰어놀고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카르페디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아이들이야말로 불행하다.
관측을 끝내고 로비로 돌아가니 동호 상태가 말이 아니다. 아빠랑 떨어지면서부터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이다. 나는 엄마랑 달리 웬만하면 동호가 해 달라는 걸 다 해주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동호는 ‘아빠 껌딱지’가 되어 버렸다. 되고 안 되고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엄마 기준과 아빠 기준이 달라지고 일관된 양육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예쁜데. 아빠는 괴롭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후다닥 칫솔 꺼내고 수건을 목에 걸고 씻기 시작했다. 야영 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게 씻는 일이다.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이렇게 시설 좋은 곳에 놀러 왔을 땐 반드시 씻어야 한다. 안 그러면 야영장의 불 꺼진 화장실 세면대에서 씻는 둥 마는 둥 해야 한다. 직원들과 옆 사람들의 눈치야 잠시지만, 깨끗하게 씻고 난 후의 개운함은 밤새 간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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