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언제나 응원하며 따뜻하게 안아줄게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잠자리가 바뀌기도 했고, 아무도 없어 무섭기도 했다. 무엇보다 바람이 문제였다. 1,950미터 한라산 정상에서 출발한 바람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면서 나무를 만나고 숲을 통과하며 엄청난 공명현상을 일으켰다. 100미터 앞, 50미터 앞, 10미터 앞.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바람은 모든 에너지를 소리로 바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리며 다가와 우리 텐트를 거세게 강타했다. 마치 거대한 눈사태 같은 '바람사태'였다.
날이 밝자,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고 평온해졌다. 하지만 불안으로 밤새 부대낀 나의 영혼은 지난밤이 제주도여행 중 최악이었음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게다가 오늘은 이중섭미술관을 가기로 한 날이 아닌가. 바닷가로 나가 애들 풀어놓고 한숨 자도 모자랄 판에, 하필이면 미술관이라니. 따분한 애들은 온종일 엄마, 아빠에게만 매달릴 게 분명했다.
이중섭미술관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서귀포 시내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 이곳으로 피난 와서 1년 가까이 살았다. 미술관 바로 아래에는 이중섭이 살았다는 거주지도 복원되어 있다. 1.4평 방 하나와 1.9평 부엌이 전부인 단칸방 초가집이다. 이 좁은 곳에서 어떻게 네 가족이 지낼 수 있었을지 놀랍다.
이중섭과 그의 가족이 지낸 방
그런데 이중섭에게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비록 가난으로 고단한 삶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지내며 작품활동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중섭은 이듬해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 아내에게 이곳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그리운 제주도 풍경>이라는 그림을 보내기도 했다. 미술관에는 이중섭이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이 여러 장 전시되어 있는데, 풋! 좀 귀엽다. 그럼에도 최근 위작 논란에 그의 아내와 아들이 개입된 걸 보면 참 씁쓸하다.
"나의 아스파라가스군(발가락 군)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뜰한 뽀뽀를 보내오. 한없이 부드럽고 나긋한 나만의 아스파라가스 군에게 따뜻한 아고리의 뽀뽀를 전해주구려." (이중섭은 아내의 발가락이 못생겼다며 그녀를 아스파라가스라고 불렀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섶섬이 보이는 풍경>을 그렸고, 나는 찍었다. 이중섭미술관 옥상에서 본 풍경.
이중섭은 부유한 가정환경 덕에 어려서부터 확실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4살 때 오산학교에 입학해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파리에서 활동했던 임용련을 만나 본격적인 미술교육을 받았고 20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한다. 그런 이중섭을 보면서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겠지만, 그 재능을 키울 수 있었던 교육적인 여건도 무시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요새 미술적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물론 아빠 눈에^^;;, 동욱이는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획일화된 교육 속에서 오직 성적으로만 자신의 삶을 채우려 했던 아빠의 성장기는 어찌나 메마르고 앙상하던지. 그래서 우리 애들은 좀 달랐으면 좋겠다. 꼭 정해진 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진짜 하고 싶은지 끝까지 찾아가면 좋겠다. 비록 더디고 힘들더라도 그게 진짜 자기에게 충만한 삶일 테니, 아빠도 그런 동욱이 동호를 언제나 응원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야영장에 놀이터가 있다. 꽃밭놀이터. 애들은 신발도 벗은 채로 뛰어놀기 바쁘다.
저녁에는 생일파티를 열었다. 오늘은 동호랑 아빠 생일이다. 케이크에 불도 붙이고 미역국도 끓여 먹었다. 그리고 같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흥겨운 파티를 열었다. 비록 악기는 없었지만, 입과 손으로 흉내를 내며 즉흥연주를 펼치기도 했다. 아빠는 젬베, 엄마는 피아노, 동욱이는 우쿨렐레, 동호는 탬버린을 쳤다. 이렇게 노니까, 실제로도 온 가족이 악기 하나씩을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이 바람도 이뤄지겠지. 오늘 밤은 왠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동호야 생일 축하해. 지난 1년동안 건강해서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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