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야영장 우리 집!
[5월 5일] ‘라복새’를 아시나요?
숲의 아침은 새소리에서 비롯한다. 어둠에서 흘러나온 시간은 분명 연속적이지만, 아침이 열리는 순간은 어느 변곡점에 이르러야 발생한다. 새소리는 그 변곡점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시작은 한 마리였다. 작은 새가 지저귀는 짧은 외침이었지만, 강렬하고 청명한 울림은 온 세상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이어진 적막과 두 번째 지저귐. 그러자 신기하게도 반대편에서 또 다른 새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듯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어느새 수십 마리의 합창으로 변한다. 모두가 제각각 다른 소리다. 놀랍다. 동욱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라복~ 라복~’, 이렇게 우는 새소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빠, 우리 라복새라고 부를까?” 새로운 종의 새가 인류에게 보고되는 순간이다. 그후로도 우리는 종종 독특한 새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지으며 놀곤 했다.
관음사야영장은 한라산 관음사코스 입구에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큰 주차장이 보이고 정면에 관리사무소가 보인다. 관리사무소 왼쪽 조그만 길에서 한라산 등산로가 시작한다. 주차장은 넓은 잔디밭으로 연결되는데, 잔디밭 위쪽이 바로 야영장이다. 우리 텐트는 그보다 더 위쪽인 숲 속에 있다. 관음사야영장은 주차장까지만 차가 들어갈 수 있어 손수레를 이용해 짐을 운반해야 한다. 위쪽 숲 속까지 무거운 짐을 옮기려면 힘이 곱절로 들지만, 한적한 야영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럼에도 오늘은 토요일, 야영장이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수많은 야영객은 물론이고 교회 야유회까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는 빨리 아침을 해치우고 야영장을 나섰다.
관음사야영장 잔디밭에서 손잡고 놀고 있는 동욱이와 동호
오늘은 삼양검은모래해변을 찾았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래사장이 검은 게 이색적이다. 화산석인 현무암 가루 때문이다. 이곳에선 동호가 예사롭지 않다. 검은 모래사장이 신기한가 보다. 장난감 그릇을 하나 들고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래 놀이에 빠져든다. 춤추듯 검은 무늬가 펼쳐진 모래사장과 조동호의 왠지 모를 촌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어제도, 그제도 꼭 그 자리에서 놀았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검은모래해변을 걷고 있는 아내와 동호
동호, 왜 촌티가 날까?
엉거주춤한 동호, 혼자서도 잘 논다
오후에는 목욕탕에 갔다. 시설을 잘 갖춘 야영장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도 있지만, 여긴 그렇지 않다. 공중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매번 애들을 씻겨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사실 동욱이랑 함께 목욕탕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등도 밀어주고 바나나우유도 먹고, 뭐 이런 시시콜콜한 로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도 실현되진 못했다. 안경을 차에 두고 가는 바람에 홀딱 벗고도 선글라스를 낀 채 목욕탕을 누벼야 하는 민망한 장면만 연출했다.
동욱이는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무릎에 난 상처도 아물지 않아 뜨거운 탕에 들어가는 게 힘들었을 텐데 아빠 품에 쏙 안겨 잘 버텼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거품에도 한참을 재밌어한다.
동욱이랑 목욕탕에 있으니 어렸을 때 아버지와 목욕탕에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뭉뚱그려진 기억의 단편이지만, 내가 또 언제 아버지랑 목욕탕엘 갈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그렇게 동욱이는 종종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아버지가 동욱이를 안고 있었는데, 이 녀석 나를 닮은 게 아니라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싶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이해해주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한 적도 있었지만, 동욱이는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가 동욱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듯이 아버지도 내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이겠지. 그리고 이 녀석도 모르겠지. 아, 너무 늙어버린 아버지 생각에 또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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