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 월정리 바닷가를 거니는 두 여인 (월정리)
어젯밤엔 바람이 없어 잘 잘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딱 한 번 깬 것 같은데, 멀리서 뱃소리와 종소리가 들린 듯 했다. 너무 편안한 소리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꿈속에서 들린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텐트 안에서 뒹굴뒹굴하다 동욱이랑 동호가 또 싸운다. 동욱이가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동호가 자기도 그리겠다고 나섰고, 그걸 막으려던 동욱이와 동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뭐, 늘 비슷한 패턴이다. 서로 아빠를 차지하겠다는 녀석들의 결투랄까.
오늘은 멀리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오신다. 오늘부터 마지막 날까지 나흘간 같이 머물 예정이다. 목포에서 배를 탔다는 장인어른 전화에 부랴부랴 텐트 정리에 나선다.
일단 월정리 민박집에 짐을 풀고 제주여객터미널로 나간다. 12시 30분쯤 배가 도착할 텐데, 그 사이에 아내에게 할 일이 생겼다. 새로운 일자리 때문에 급히 이력서를 써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금방 일자리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좀 더 쉴 수 없어 괜히 미안하다. 게다가 여행이 사흘밖에 남지 않은 이 상황에 이력서를 쓰기 위해 PC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그깟 일자리쯤은 서울 올라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호기롭게 아내 팔을 붙잡고 바다로 향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아무래도 미안하다.
아내가 PC방으로 들어가고 애들이랑 나는 그동안 놀 곳을 찾아 주위를 배회했다. 사실,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으면 애들은 책을 보면 좋겠다 싶어 기적의도서관, 달리도서관 등등을 전전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우리가 간 곳은 제주시청 앞마당. 그나마 한적하고 그늘이 많아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별다른 재미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이내 칭얼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파워레인저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호에게는 마이쮸 하나를 물려주고. 그랬더니 어찌나 평온한지.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드디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제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전복물회로 제주의 맛을 선사해드리고자 도두항 순옥이네명가로 모셨다. 역시 시원하고 꼬들꼬들한 맛이 일품이다.
월정리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동문시장에서 장을 봤다. 과일이랑 반찬거리도 사고 고모네랑 외삼촌네 보낼 한라봉도 주문했다. 오메기떡도 사 먹고. 오메기떡은 차조가루를 반죽해 삶고 팥고물을 묻힌 제주지역 전통 음식이다.
고래가 될 카페에서 본 월정리 바다
역시 월정리 바다가 최고야
일찌감치 저녁을 해먹고 온 가족이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아내가 장모님 손을 잡고 월정리 바닷가를 걷는다. 아내는 세상 모든 딸이 그렇듯 결혼 후 장모님과 관계가 더욱 애틋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도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아들은 결혼하면 남이 되어 버리지만, 딸은 비로소 자식 노릇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남성이 중심인 가부장제는 잘못된 제도가 분명하다.
결혼하고 가장 힘든 게 처가 식구와의 관계였다. 30년 가까이 생면부지였던 사람들을 갑자기 가족으로 여겨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직장도 아니고 수입도 변변찮아서 장인어른, 장모님에겐 늘 자격지심이 컸다. 언제 번듯하게 살거냐는 잔소리는 그냥 흘려버리면 될 것을 마음 한편에 쌓아두고 섭섭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못난 사람처럼 경거망동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 형편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마음은 그냥 편안하다. 시간이 해결해준 것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아내의 도움이 컸다. 아내가 나의 자존감을 세워줬기 때문이다. 아내는 늘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흔쾌히 모셨다. 아내에게,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이번 여행이 좋은 선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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