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8. 29. 17:26

[5월 29일] 그곳이 어디든 무엇을 하든, 거기가 제주라면 그것으로 충분해 (선흘리 동백동산, 평대리 아일랜드조르바)


아침부터 동욱이가 그림을 그려 달란다. 물론 파워레인져. 대개 아빠가 밑그림을 그려주면 색칠은 동욱이가 하는데, 오늘은 왠지 색칠까지 아빠가 하란다. 피곤하기도 하고 색칠까지 해주는 건 아니다 싶어 그냥 나가버렸더니 울고불고 난리다. 그냥 그려줄걸,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애들이 뭔가를 요구할 때 그것이 안 되는 일이다 싶으면 정말 그런지, 어른의 기준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애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그런데 이게 좀 난감한 상황일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잠을 자야 할 시간인데 더 놀겠다거나,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림을 그리겠다거나. 일찍 자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게 좋겠지만, 이게 쉽지 않다. 이건 왜 되는 일이고 이건 왜 안 되는 일인지, 아이들과 합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의 욕구를 충분히 받아주는 것과 안 되는 일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 그 사이 틈이 너무 크다.


오전 10시 반, 오늘은 장모님 덕에 조금 일찍 일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감기에 걸린 장인어른이 혼자 숙소에 남기로 하고.


오늘 우리가 갈 곳은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이곳은 선흘리 곶자왈에 형성된 내륙습지로 생태 특성과 학술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협약으로 등록된 곳이다. 원래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동산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동백나무 외에도 여러 난대성 수종이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찾는 길이 약간 어려웠는데, 함덕초등학교 선흘분교를 찾아가면 된다.


나무터널로 이뤄진 길을 따라 숲 속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땅과 물이 허물없이 만나고 그 위로 나무가 자라고, 또 그 위로 새가 걷고, 꽃도 피고. 이들의 관계로 펼쳐진 숲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였다. 



조동호 이송 작전 수행 중


멸종위기야생식물 순채


물 위로 나무가 자라고, 물 아래로도 나무가 자란다


나무 뒤 습지와 새


조동욱 저 포즈 좀 봐



오후에는 근 한 달 만에 아내와 단둘이 데이트를 즐겼다. 장모님이 애들을 봐주시기로 한 것. 그런데 엄마와 떨어지는 게 싫은 동호가 엉엉 운다. 애들에겐 약간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동안 애들에게 최선을 다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길을 나섰다.


우리가 찾은 곳은 바로 옆 마을 평대리 아일랜드조르바. 원래 월정리에 있던 카페였는데 얼마 전 평대리로 옮겨 왔다. 바닷가에 바로 붙은 카페는 아니었지만, 아담한 마당이 있고 한적했다. 우리 부부는 그곳에서 커피를 시켜 놓고 평상에 앉아 그냥 멍하니 있었다. 별다른 얘기도 없고 특별한 일도 없었다. 그냥 바닷소리 듣고, 나무 냄새 맡고, 햇살도 즐기고. 그곳이 어디든 무엇을 하든, 거기가 제주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월정리 숙소로 돌아오니 동호가 엄마에게 와락 안긴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엄마를 만난 기쁨과 그간의 슬픔이 동시에 묻어나는 표정이다. 그덕에 동호는 오늘밤 엄마 옆에서 원없이 물고 빨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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