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2. 6. 8. 15:05

제주도 어느 해변에서 뛰어놀고 있는 엄마와 아이들

 

 
[5월 1일] 파워레인저와 악당 파이프반기, 한 달이나 지지고 볶고 싸우라고!


어제 늦게까지 짐을 싸느라 늦잠을 자고 말았다. 원래 계획은 새벽에 출발하는 거였다. 애들이 좁은 차를 타고 너덧 시간 걸리는 정읍까지 내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하겠나. 그래서 최대한 빨리 출발해 애들이 잘 때 신속하게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글러 먹었다. 우리 네 식구는 트렁크는 물론 뒷좌석까지 차지한 각종 짐들과 함께 서로 부대끼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간의 캠핑.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건 6살 조동욱과 3살 조동호, 이 애들과 단 한 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보낼 일이었다. 일주일에 이틀,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한 달 동안이나 애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악당 파이프반기가 되어 파워레인저 조동욱과 싸우는 일도 한두 시간이고 무작정 달라붙는 15킬로그램 우량아 조동호를 안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다. 피골이 상접한 아빠가 사랑과 믿음만으로 이겨내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그래도 다 이 애들 때문이다. 엄마, 아빠 일 핑계로 첫 돌로 못 돼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던 불쌍한 놈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아침 일찍 노란 봉고차에 실려 가서 엄마, 아빠랑은 고작해야 잠들기 전까지 두세 시간 밖에 보낼 수 없다. 요새는 새로 어린이집을 옮기면서 동욱이는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고 동호는 틈만 나면 엄마 찌찌를 찾는다. 그 짧은 시간에도 불쑥불쑥 화가 치밀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지금 아니면 받지도 못할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한 건 아닌지, 늘 안쓰럽고 미안했다.

 

물론 엄마와 아빠에게도 꼭 필요한 여행이었다. 일하랴 애 키우랴, 나이 서른다섯에 뼈 마디마디 파스 붙이고 진통제 먹으며 끙끙 앓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자기 일 때려치울 테니 한 달 동안 여행 가자고 아내가 처음 말했을 때 당장에 그러자고 했다. 마침 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었고, 그렇게 우리에게는 모두 사랑과 치유, 도약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전국여행이었다. 그래서 전국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 루트를 짜는데, 이게 쉽지 않다. 전국을 누비기엔 한 달이 너무 짧은 거다. 우리는 과감하게 지역을 축소하기로 했고 그곳을 제주도로 하는 데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제주도, 이 얼마나 황홀한 곳인가. 그때부터 제주도와 관련한 각종 여행서적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마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할지, 또 뭘 먹을지 궁리하고 계획했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절대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일분, 일초까지도 일말의 아쉬움 없이 깨알같이 보내고 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것도 쉽지가 않다. 하루하루 지나고 더 많은 여행 정보를 접할수록 어제의 계획은 꼬이기가 십상이었다. 또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에만 익숙해진 나로서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이 임박해서야 깨달았다. 계획이란 필요 없다는 걸. 그건 현실의 시간에서나 통용되는 실용적인 절차일 뿐, 상상의 시간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을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돌아오는 날만 정한 채 무작정 제주도로 떠나게 되었다.

Posted by altern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