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2. 7. 9. 17:54

[5월 7일] 오늘 바다는 어제보다 눈부시다


바람 탓에 밤잠을 설쳐 아침부터 찌뿌둥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모래놀이에 열중이다. 애들까지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졸라댔으면 최악의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모래놀이 판을 벌인 곳은 바닷가의 넓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텐트 옆 길가에 쌓인 작은 모래 더미였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은 신발을 벗어 모래의 감촉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놀이에 집중했다. 신발은 모래를 퍼 나르는 포크레인이 되고, 속도를 뽐내는 경주용 자동차가 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된다. 이 녀석들에겐 주위의 모든 물건이 그저 장난감일 뿐이다.

 

 

스스로 잘 놀고 있으니, 참 고맙다.

 

 

그럼에도 마트에만 가면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를 쓴다. 사촌 형들에게 물려받은 장난감이 방안 가득한데도 말이다. 특히 <파워레인저>에 푹 빠져 있는 동욱이는 유독 <파워레인저> 장난감에 눈독을 들인다. 대부분은 총이나 칼과 같은 전투용 장난감들이다. 쉽게 사 줄 수가 없다. 하지만 구둣주걱으로 정의의 검을 휘두르는 녀석의 진지한 표정을 떠올리면 사정은 달라진다. 녀석이 너무 폭력적인 놀이에 빠져드는 건 아닌지 걱정하다가도 애들의 놀이를 너무 어른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남자아이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으로 여자아이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또 대체로 여자아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남자아이는 자신의 지배력과 의지를 중요하게 여겨 승부욕이 강하다. 이맘때 남자아이들이 <파워레인저>에 빠져들고 총과 칼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 <우뢰매>를 보면서 지구의 평화를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무조건 부정하고 가로막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아이의 승부욕과 운동에너지를 발산할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양육이다.

 

피곤한 몸은 오후가 돼서야 풀렸다. 동호는 낮잠 자고 엄마랑 동욱이는 바닷가에 물놀이 나갔다. 혼자 텐트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아주 좋다. 이것이 진짜 여행이다.

 

오후 2시가 되니 바닷물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지구의 원심력이 달의 인력을 물리치고 바닷물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달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만 하루가 조금 넘는 24시간 50분, 오늘은 어제보다 50분 늦게 물때가 시작된다. 그래서 같은 시간, 같은 바다지만 사실은 늘 다른 바다이다. 햇살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물의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바다의 푸른 빛깔도 다 다르다. 오늘 이 바다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유일한 바다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바다는 어제보다 더 눈부시다.

 

동호가 깨고 우리는 모두 물놀이를 즐겼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엔 더 넓은 백사장이 열렸다. 군데군데 미처 바닷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작은 바다도 생겼다. 작은 물고기들도 많다. 물고기도 쫓고 맘껏 달리기도 하고, 어린 동욱이와 동호가 놀기엔 안성맞춤이다.

 

 

작은 물고기들이 무서운지 처음엔 손을 꼭 잡고 있다.

 

물고기 쫓기에 재미를 붙인 조동욱.

 

동호도 재미있는 표정으로 물고기 쫓기에 나섰다.

물이 빠져나간 곳에 아내와 아이들이 남았다.

 

오후 늦게 텐트를 철수하고 월정리로 이동했다. 월정리는 이곳 김녕성세기해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동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해수욕장이나 관광지가 없어서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유명세가 덜 한 탓에 조용하게 아름다운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월정리에서는 민박을 한다. 마침 아는 선배의 소개로 민박을 독채로 저렴하게 얻을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따뜻한 물로 씻고 텔레비전도 보고 방바닥에 등짝도 붙였다. 야영생활도 좋지만 역시 집이 좋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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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2. 6. 8. 15:05

제주도 어느 해변에서 뛰어놀고 있는 엄마와 아이들

 

 
[5월 1일] 파워레인저와 악당 파이프반기, 한 달이나 지지고 볶고 싸우라고!


어제 늦게까지 짐을 싸느라 늦잠을 자고 말았다. 원래 계획은 새벽에 출발하는 거였다. 애들이 좁은 차를 타고 너덧 시간 걸리는 정읍까지 내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나 따분하고 지루하겠나. 그래서 최대한 빨리 출발해 애들이 잘 때 신속하게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글러 먹었다. 우리 네 식구는 트렁크는 물론 뒷좌석까지 차지한 각종 짐들과 함께 서로 부대끼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간의 캠핑.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건 6살 조동욱과 3살 조동호, 이 애들과 단 한 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보낼 일이었다. 일주일에 이틀,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한 달 동안이나 애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 악당 파이프반기가 되어 파워레인저 조동욱과 싸우는 일도 한두 시간이고 무작정 달라붙는 15킬로그램 우량아 조동호를 안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다. 피골이 상접한 아빠가 사랑과 믿음만으로 이겨내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그래도 다 이 애들 때문이다. 엄마, 아빠 일 핑계로 첫 돌로 못 돼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던 불쌍한 놈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아침 일찍 노란 봉고차에 실려 가서 엄마, 아빠랑은 고작해야 잠들기 전까지 두세 시간 밖에 보낼 수 없다. 요새는 새로 어린이집을 옮기면서 동욱이는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고 동호는 틈만 나면 엄마 찌찌를 찾는다. 그 짧은 시간에도 불쑥불쑥 화가 치밀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지금 아니면 받지도 못할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한 건 아닌지, 늘 안쓰럽고 미안했다.

 

물론 엄마와 아빠에게도 꼭 필요한 여행이었다. 일하랴 애 키우랴, 나이 서른다섯에 뼈 마디마디 파스 붙이고 진통제 먹으며 끙끙 앓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자기 일 때려치울 테니 한 달 동안 여행 가자고 아내가 처음 말했을 때 당장에 그러자고 했다. 마침 나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었고, 그렇게 우리에게는 모두 사랑과 치유, 도약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전국여행이었다. 그래서 전국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 루트를 짜는데, 이게 쉽지 않다. 전국을 누비기엔 한 달이 너무 짧은 거다. 우리는 과감하게 지역을 축소하기로 했고 그곳을 제주도로 하는 데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제주도, 이 얼마나 황홀한 곳인가. 그때부터 제주도와 관련한 각종 여행서적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마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할지, 또 뭘 먹을지 궁리하고 계획했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절대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일분, 일초까지도 일말의 아쉬움 없이 깨알같이 보내고 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것도 쉽지가 않다. 하루하루 지나고 더 많은 여행 정보를 접할수록 어제의 계획은 꼬이기가 십상이었다. 또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에만 익숙해진 나로서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이 임박해서야 깨달았다. 계획이란 필요 없다는 걸. 그건 현실의 시간에서나 통용되는 실용적인 절차일 뿐, 상상의 시간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을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돌아오는 날만 정한 채 무작정 제주도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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