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3. 5. 25. 21:05

[5월 24일]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만나다 (비자림)


후드득후드득 빗소리에 잠이 깬다. 비가 와서 걱정이지만,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어찌나 생동감 넘치는지 정신이 맑아진다. 한껏 당겨져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흩어지고 다시 떨어져 또르르 구른다. 하늘 위의 불꽃놀이처럼 텐트 위에서 물꽃놀이가 펼쳐진다.


오늘 갈 곳은 비자림,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에 있는 비자나무 군락지다. 모두 2,800여 그루가 있다는데 단일 품종 군락으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매표소를 지나면 맨 처음 벼락 맞은 비자나무가 나온다. 벼락은 구름과 땅 사이에서 발생하는 방전 현상인데, 폭우로 습기가 많아지면 공기층의 전도성이 높아져 벼락이 내리게 된다. 대개 뾰족한 부분에 많이 내려 벼락 맞은 나무를 종종 보게 되는데, 이 나무는 벼락을 맞고도 살았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길 수밖에. 벼락 맞은 나무를 만지면 피부병이 낫는다고 한다.



연리지.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하나가 되었다



벼락 맞은 비자나무를 지나 30여 분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수명이 825년인 비자나무도 나온다. 이름은 새천년비자나무. 울창한 비자나무 숲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영혼의 나무 '에이와나무'같은 느낌이다. 비자나무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것은 음지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내음성이 강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대신 아주 천천히 자란다. 속도를 내주고 생명을 얻은 셈이다.



새천년비자나무. 키가 14미터에 수관폭은 15미터나 된다



새천년비자나무를 반환점 삼아 돌아오면 비자나무 우물이 나온다. 옛날 비자나무 숲 지킴이 산감이 먹었던 물이란다. 물이 귀한 제주도지만, 이곳만큼은 수많은 비자나무들의 뿌리가 물을 머금고 조금씩 흘려보내 항상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비자나무의 잔뿌리가 정수 기능을 해 물이 맑다고. 그러니 자연이야말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진정한 의미의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이렇게 한 바퀴 돌면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우리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애들과 움직이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동호는 요즘 혼자 하려는 게 부쩍 많아지면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늘었다. 유모차 벨트 매는 것 하나에도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끝까지 기다리고 응원하는 것 말고는 별수가 없다.


비자림에서 나오는 길에 동욱이가 무덤을 가리킨다. 제주도에는 무덤이 흔한데, 특이한 것은 밭 한가운데 돌담으로 둘러싸인 무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산담이라고 한다. 소나 말이 무덤을 훼손하는 것을 막고 봉분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산담을 만들었다. 또 농부들은 산담 안에서 밥도 먹고 농기구를 보관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제주가 바로 그곳이다.



생존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오후에는 성산 읍내로 나가 병원을 찾았다. 동욱이가 고추에 염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제주에서 한 달간 캠핑하면서 지낸다며 혹시 잘 씻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우리를 미개인처럼 쳐다본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다니는 게 뭐가 그렇게 좋으냐면서 말이다. 


물론 동욱이가 아픈 건 나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의사의 말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다. 도대체 깨끗하다는 것, 청결이란 무엇인지. 지나친 청결이 아토피성 피부염과 천식의 원인이란 의학적 주장도 있고 청결과 편리함을 강조하는 일회용 생리대가 여성 질병의 원인이란 주장도 있지 않나. 어찌 보면 청결이란 현대 물질문명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르겠다. 청결해야 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상품을 소비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건강한 삶이 곧 청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야영장으로 돌아오니 다시 비가 내린다. 애들 재우고 텐트 안에서 후드득 물꽃놀이 소리를 듣고 있으니 오늘 하루 시작과 끝이 연결된 느낌이다. 제주도에 내려온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4일이다. 이제 곧 이 여행도 끝이 나겠지. 동욱이가 빨리 낫기를 바라며 내일 하루도 열심히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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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5. 16. 16:41

[5 23]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 (표선해비치해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날이 잔뜩 흐리다. 오늘도 애들은 어김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 안에서 뒹굴며 논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기들끼리도 논다. 덕분에 느긋하게 모닝커피도 즐기고 여유로운 아침이다. 침낭 사건만 터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건은 간단하다. 애들이 엄마, 아빠가 털고 있는 침낭을 붙잡고 장난치다가 넘어진 것이다. 이제 그만하자고 번을 타일지만, 말을 듣다 결국 그렇게 . 아빠가 혼을 내자 동욱이가 펑펑 울면서 마디 한다. "재미있게 노는 건데 못하게 !"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 아이들에겐 놀이와 재미가 전부지. 그런데 고작해야 빨리 침낭을 털어야 한다는 이유로 재미있는 놀이를 못하게 했으니, 동욱이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웬만큼 위험한 일이 아니고서야 안전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어찌 보면 어른의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결국 아이들 몫이니까. 비록 시간이 걸리고 넘어지고 다칠지라도, 아이들이 재미를 온전히 다 누릴 수 있도록, 아빠가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아침을 먹고 김영갑갤러리를 찾았으나 문의 닫혔다. 매주 수요일이 휴관일일 줄이야. 어쩔 없이 다시 표선해비치해변으로 향했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으므로 그냥 해변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로 한 것이다.


점심은 표선면 세화리 광동식당에서 먹었다. 식당은 관광지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 있었다. 그래서 관광객은 없고 지역 주민만 눈에 띈다. 메뉴는 두루치기.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고기를 대야 주시면서 주인아주머니가 "먹을 만큼 퍼가라. 대신 남기면 된다."라고 하신다. 우와! 이럴 수가. 그런데 정작 퍼간 고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남길까 봐. 그럼에도 많이 담았는지 남김없이 먹느라 배가 터질 듯했다. 



처음 이 대야를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ㅋㅋ



배불리 먹고 다시 찾은 표선해비치해변. 아이들이 먼저 후다닥 뛰쳐나간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까르르 웃으며 다시 도망쳐 나오길 수십 . 파도가 무섭다던 동호도 아빠 손을 잡고 연신 바다속으로 돌진한다.



조동욱 잡아라!



폴짝 뛰어오른 조동욱. 무술을 연마하는 듯.


 

파도 놀이를 끝낸 다음엔 곧장 모래 놀이를 시작한다. 모래 언덕에 올라 모래를 파고 나르고 쌓고 짓고 부수고. 


그렇게 끝을 모르던 아이들의 놀이는 공놀이에서 절정을 맞는다. 오늘 공놀이 제목은 이름 하여 '월드 그랑프리 차기 대회'. 동욱이는 천사의 눈물 , 정글 스트라이크 온갖 만화 영화에서 나온 공격 주문을 외치며 비장하게 공을 찼다. 그러다 내가 "이것만은 당해낼걸. 자, 받아라! 제주도 화산 !"이라고 외치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게 재미있었는지 자기도 제주도 바다 , 제주도 미역 등등을 외치며 공을 차기 시작한다.

 

공놀이가 끝나자 동호는 또다시 모래 해변을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모래를 파서 손도 담그고 발도 묻는다. 동호를 따라 모래를 파보니 모래 밑으로 가라앉은 물이 솟아올랐다. 햇볕을 받아 따뜻하고 보드라운 모래 밑에 물을 머금은 차고 점성이 높은 모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게 신기했던지 동호는 좀처럼 모래밭에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얼굴이 모래 범벅이 되고 눈에 모래가 들어가 펑펑 울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올 있었다.



동호의 모래삼매경




아무튼, 오늘 하루의 교훈은 하나, 아이들의 놀이엔 끝이 없단 사실이다. 아침에 뜨면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이렇게 조그만 녀석들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에너지가 나올 있는지 도무지 미스터리가 아닐 없다. 


그런데 어쩌면 놀이야말로 아이들의 본령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병이 마음껏 놀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도 했다. 하루를 아이는 짜증을 모르고 10년을 아이는 마음이 건강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잘 놀아 준 동욱이 동호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집에 가면 또 언제 이렇게 놀 수 있을지 모르니,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 놀고 놀고 또 놀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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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4. 26. 01:05

[5월 22일] 동호가 저 바다를 책으로 배우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몰라 (우도)


일출을 보겠다는 어젯밤 다짐은 결국 의욕에 지나지 않았다. 우도가 제주도에서 가장 동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떠오르는 해를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침에 눈을 뜬 건 이미 해가 바다 위로 한참 떠오른 후였다. 맨날 뜨는 해가 여기라고 뭐 다른 게 있겠느냐며 애써 위안할 뿐이다.


그런데 동호가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열고 "바다!"라고 외친다. 아직도 외계어가 많은 동호지만, 이제 바다만큼은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다. 동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바다는 아침 해를 흠씬 머금고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동호가 저 바다를 책으로 배운지 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얼른 아침을 먹고 바닷가로 나간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지만, 오랜만에 바다로 놀이를 나온 동욱이는 신이 났다. 바닷물에 발도 담그고 버려진 페트병으로 모래 장난도 하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호가 아빠 품을 파고든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동호를 안고 카페로 들어갔다.



해변가에서 동욱이랑 동호, 엄마


동욱이는 달리기를 좋아해



카페에서 동호를 안고 멍하니 있는데 불현듯이 조금 못마땅한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찬란한 바다를 두고 고작 카페에서 잠든 애나 안고 있다니. 일분일초라도 아껴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텐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밖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분주하게 움직이며 호호하며 웃고 떠들며 사진도 찍고 사라진다. 아, 처량한 내 신세여.


그런데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자니, 몸이 점점 나른해지면서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더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진다. 어쩌면 바다에서 향정신성 물질이 마구 쏟아져 나와 나의 중추신경을 이완해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게 힐링인가. 편안하고 좋다.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격으로 우도에서 진짜 바다를 만난 것 같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이다.



저 많은 포스트잇 좀 봐. 저 사람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점심은 보말칼국수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비양도로 향했다. 제주도에는 두 개의 비양도가 있다. 서쪽 협재 해변에서 보이는 비양도와 이곳 비양도가 그것이다. 서쪽 비양도는 지는 해를 올린다는 뜻에서 '떠오를 양(揚)'을, 이곳 비양도는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 해서 ‘볕 양(陽)’을 쓴다. 흔히 이곳 비양도를 '섬 중의 섬'이라고 하는데, 사실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그런 느낌은 별로다.


비양도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드나드는 길목답게 바람이 강했다. 하지만 넘실대는 바다와 푸른 초원 위로 지천으로 핀 들꽃이 그림 같은 곳이다. 



동호와 아빠, 설정 샷. ㅋㅋ


정말 근사하지.


회오리바람 일으키며 아빠에게 달려오는 동호


돈짓당. 이곳에서 바다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영등할망은 2월 초하루 제주도로 들어와 보름 간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농경지에는 곡식을 뿌려 주고 갯가 연변에는 전복, 소라 등이 많이 자랄 수 있도록 해초 씨를 뿌려 준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고 하며 영등할망을 위한 영등굿을 벌인다. 영등할망은 요새로 치면 꽃샘추위인 셈인데, 이게 오죽 심했으면 굿까지 벌였겠나 싶다. 세상의 모든 풍요의 여신이 그렇듯, 영등할망 역시 척박한 자연환경과 그에 순응해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시 30분, 다시 배를 타고 성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단하게 장을 본 뒤, 모구리야영장으로 출발했다. 모구리야영장은 성산읍에서 서쪽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30분 정도 차로 달려야 나온다. 불과 30분의 거리지만, 바다의 정취는 온데간데없고 산과 들판의 대륙적인 광경만 눈앞에 가드하다.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 야누스의 제주도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모구리야영장은 모구리오름 서쪽 자락에 있다. 마치 새끼를 안고 있는 어미 개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모구악(母狗岳), 모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와, 야영장이 정말 환상이다. 넓은 초원과 어우러진 영지는 물론, 탁 트인 시선 앞으로 펼쳐진 크고 작은 오름들과 이국적인 느낌의 풍력발전기까지. 게다가 시설은 또 어떻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장이 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마치 '캠핑천국'에 온 듯한 느낌이다.



모구리 우리집



이러 저리 둘러보며 어디에 텐트를 칠까 궁리하다, 외지고 전망도 좋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것 자리에 짐을 풀었다. 차를 야영장 안으로 끌고 올 수 없어 짐을 옮기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이 정도야 뭐 충분히 감내하고도 남는다. 


후다닥 저녁도 먹고 야영장 산책도 하고 나니, 아이들은 8시가 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이곳 모구리야영장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잠든 아이들의 입가에도 빙그레한 미소가 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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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4. 12. 16:56

[5월 21일] '물 우이 삼 년 물 아래 삼 년' (우도)


동욱이가 이불에 오줌을 쌌다. 위아래 옷이며 깔고 자는 요까지 흠뻑 젖었다. 원래 쉬를 잘 가렸는데 많이 피곤했나 보다. 녀석, 얼마나 민망할까. 어렸을 때 이불에 오줌 싸고 새벽에 깨서 "엄마, 나 오줌 쌌어"라는 말이 입가에서만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후다닥 옷과 이불을 빨아서 널었는데, 다행히 아침부터 볕이 좋아 금방 마른다.


오늘은 돈내코에서 철수하는 날이다. 아침 먹고 오전 내내 짐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동호가 아빠에게 안 떨어진다. 뭐가 성에 안 찼는지, 하필 오늘 같은 날 계속 칭얼대고 운다. 그러다 짐을 다 싸고 차가 출발하자 바로 곯아떨어진다. 가엽다.


아이의 욕구 불만은 대체로 어른 탓이다. 엄마, 아빠가 모두 짐을 싸느라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데, 오죽 심심하고 관심을 받고 싶었겠나.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징징거리는지 화딱지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다. 아이의 처지에 먼저 공감해야 아이도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믿고 기다려주는 만큼, 딱 그만큼 아이들은 자란다.


오늘은 우도로 간다. 성산항에서 배 타고 15분. 그 짧은 순간에도 조류가 강해 배가 휘청휘청한다. 제주도의 창세여신 설문대할망의 거센 오줌발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우도는 설문대할망의 오줌발로 땅이 떨어져 나가 생긴 섬이다. 


우도 앞바다는 짙고 밀도가 높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탄성이 터진다. 돌고래다! 돌고래 무리가 물 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우와! 대단하다. 최근 돌고래 무리가 자주 출연한다더니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돌고래가 나타난다는 것은 제주도 바다가 점점 뜨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양생태계의 혼란은 물론, 해수면 상승 등 온갖 기후변화의 악영향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돌고래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는 것보다 제주도 난대성 토종 어종인 자리돔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도에 도착해 제일 먼저 서빈백사를 찾았다. 10여 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하얀 모래밭의 눈부신 바다를 떠올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여느 관광지나 다름없는 북적대는 해변이다. 관광객을 실은 셔틀버스도 연신 왔다갔다한다. 그리고 "우도에서 골프카트 및 전기자동차를 임대 운영하는 것은 불법입니다"라는 현수막까지.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지 실망도 크다. 


우도에서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은 서빈백사, 하고수동해변, 비양도, 이렇게 세 곳. 어디가 좋을지 일단 둘러보기로 하고 섬 한 바퀴를 돌았다. 서빈백사는 사람이 너무 많고, 하고수동해변은 아이들 놀기는 좋지만 바람이 너무 세다. 비양도 역시 경치는 좋지만, 바람이 장난 아니다. 어쩌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텐트 치는 건 포기하고 하고수동해변 근처에 민박을 잡았다.



우도에서 본 제주도. 제주도가 오름의 섬이란 걸 알 수 있다


하고수동해변에서 한 컷



비양도에서도 한 컷. 엄마랑 동호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민박은 할머니 혼자 사시는 낡고 허름한 바닷가 집이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 방과 우리 방이 있다. 애들은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 논다. 텔레비전이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애들이 할머니와 거리낌 없이 지내니 좋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를 싫어했던 것 같다. 뭉뚱그려진 기억이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기억은 또렷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고개를 떨구시던 아버지 모습이다.


고무 대야 두 개면 충분해 ^^


민박집 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라고 하셨다. 젊어서는 객지로 나가 결혼도 하셨지만, 결국 혼자 몸으로 다시 이곳으로 오셨단다. 자식들이 제주시와 부산에 살고 있는데, 부담되기 싫어 여기서 혼자 사신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는 잠녀옷이 걸려 있다. (해녀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건너 온 말이고 애초에는 잠녀, 잠수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즘도 물질을 하시냐고 묻자, 요새 젊은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나이는 다 한다고 하신다. 할머니에게 물질은 선택 가능한 직업이 아니라 그냥 삶의 일부라고. '물 우이 삼 년 물 아래 삼 년'이라는 제주도 속담은 거저 생긴 게 아니었다.


잠녀옷은 두꺼운 고무 옷이다. 그래서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할 수 있다. 또 부력이 좋아 위급한 상황에서 쉽게 물 위로 떠오를 수 있다. 처음에는 그냥 알몸으로 물질했는데, 그것이 금지되면서 무명 저고리에 흰 수건으로, 그리고 지금의 검은 고무 옷으로 변해 왔다. 그럼에도, 저 두꺼운 고무 옷을 뒤집어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춥고 무섭고 외로울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한다는 물질. 제주도 여성들에게 바다는 생존의 터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오늘 밤 바닷소리가 유난히 크다.


우도 밤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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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유랑가족2013. 4. 3. 23:50

[520일] 나에게 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쇠소깍, 서귀포 기적의도서관)


유난히 일찍 일어난 아이들이 눈뜨자마자 텐트 안에서 뒹굴며 논다. 부스스 일어나 시계를 보니 6시 20분. 온종일 쏘다니며 노느라 초저녁이면 곯아떨어지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엄마, 아빠는 죽을 맛이다. 다음날 일정 짜랴, 맥주도 한잔하랴, 밤늦게까지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아침이면 깨우는 애들과 더 자려는 엄마, 아빠 간에 한바탕 법석이 인다. 오늘도 한참을 뭉그적대다 겨우 일어나 애들 손에 이끌려 아침 댓바람부터 놀이터로 향한다. 


오늘은 미뤄둔 쇠소깍 테우체험을 하는 날이다. 그저께는 배 시간을 놓쳐 못 탔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오후 2시 배를 예약했다. 그러고 남는 시간엔 근처 큰엉해안경승지로 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바다를 집어 삼킬 듯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언덕이란 뜻의 큰엉해안경승지는 남원포구에서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올래5코스에 있다.


다시 쇠소깍으로. 쇠소깍은 한라산 정상에서 발원해 돈내코를 거쳐 바다로 흐르는 효돈천의 하구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효돈천은 용천수와 바닷물을 만나 깊은 웅덩이를 형성한다. 쇠소깍의 '쇠'는 근처 효돈마을을, '소'는 움폭한 물웅덩이를 '깍'은 끝을 뜻한다. 효돈마을의 옛이름이 바로 소가 누워있단 뜻의 '쇠둔'이다.


쇠소깍



'떼배', '테위' 등으로 불리는 테우는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뗏목배다. 현무암으로 형성되어 지반이 험한 제주도 연안에서 부력이 좋은 구상나무로 만든 테우는 미역이나 해초 등을 걷어 올리거나 자리돔 등을 그물로 잡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8~90년대까지만 해도 해안가 마을 집집이 테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관광 체험으로만 남아 있다.


테우는 무동력이다. 오직 물속에 드리운 밧줄을 잡아당기는 힘만으로 배가 이동한다. 태우와 밧줄 사이의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만들어 낸 힘과 움직이는 배의 '관성의 법칙'이 만들어낸 힘은 고작해야 물살의 마찰력을 겨우 이겨낼 정도다.



동호는 뚱하고



둥욱이는 좀 무서워하고



그래서 테우의 이동은 사실상 표류에 가깝다. 마치 바람에 실려 떠내려가듯 미끄러진다. 비록 속력은 느리지만, 편안하고 여유롭다. 마치 차를 타고 가면서는 볼 수 없었던 작은 골목길의 표정을 만나듯, 숲과 바다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누군가 "앗! 물고기다."라고 외치자, 모두 물속으로 시선을 옮긴다. 은어 떼다. 워낙에 물이 맑아 은어가 많이 살기도 하지만, 가는 듯 마는 듯 흘러가는 테우가 은어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속도를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라고 한다. 인간은 속도가 있어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지만, 이는 결국 마약과 같은 망각과 부정일 뿐이다. 느림이야말로 진정 나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흔들의자에 앉아 기분좋게



테우체험을 마치고 난 후에는 서귀포시로 돌아가 빨래방을 찾았다. 그동안 간단한 빨래는 야영장이나 목욕탕에서 직접 해왔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손빨래만으로는 한계가 컸다.


빨래방에서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서귀포 기적의도서관에 들렀다. 제주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크고 작은, 그리고 이색적인 도서관을 볼 수 있다. 제주도 인구는 약 55만 명, 공공도서관은 22개다. 여기에 민간 도서관이 10여 개 더 있다. 도서관 1관 당 인구는 76,926명으로 전국 최소다. 반면 인천은 158,394명으로 꼴찌. 서울은 130,078명이다. 제주도는 여러모로 축복받은 곳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리 좋을 수밖에. 아! 살고싶다, 제주도!



덕분에 아빠는 푹 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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