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랑가족2012. 11. 13. 16:44

[5월 9일]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마법같은 곳이다


오늘은 월정리 바다와 헤어지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밥을 먹고 민박집 정리하고 짐을 꾸렸는데, 오전 한나절이 후다닥 지나가 버렸다. 한집 살림을 다 챙겨다니려니 짐 꾸리는 게 정말 큰 일이다. 어떻게 하면 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제주도에 오기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이것도 빼고 저것도 뺐지만, 결국 차 트렁크는 물론이고 뒷좌석까지 짐들로 빼곡히 들어차 버렸다. 캠핑을 시작하면 여러 장비를 사들이다가 마지막에는 차를 바꾼다더니, 그 말이 충분히 수긍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건 분명 장비의 과잉이다. 캠핑을 많이 다녀보진 않았으나,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인상 깊은 텐트는 어느 손꼽히는 고가의 텐트들이 아니라 정말 단출하고 보잘 것 없는 텐트였다. 작년 가을 나의 첫 번째 캠핑, 나름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주어 마련한 장비를 처음 펼쳐 보인 날, 그 텐트는 허영과 욕심으로 가득한 나에게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사은품으로나 받았을 법한 텐트와 낡은 돗자리. 집에서 쓰던 휴대용 가스버너와 냄비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어느 부부는 고가의 장비들로 무장한 세상 모든 캠퍼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없이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도 캠핑을 하는구나. 저것이 바로 캠핑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단출한 캠핑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닮은 진짜 캠핑의 모습이 아닐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는 제주시에 있는 삼성혈에 갔다. 그곳에서 친구, 준호네 가족을 만났다. 엊그제 우연히 통화하다 그 친구네 가족도 제주도에 내려와 있는 걸 알았고 오늘 잠깐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세상 좁다는 말을 실감했고, 정말 제주도를 많이 찾는구나 싶었다.

 

삼성혈(三姓穴)은 소위 '삼성신화(三姓神話)'라고 알려진 신화의 발상지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명의 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 이들은 사냥을 하면서 살았는데, 하루는 나무함이 바닷가에 떠밀려 왔다. 열어보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명 송아지, 망아지, 오곡 종자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이들과 혼인을 했고 각자 기름진 땅에서 오곡의 씨를 뿌리며 풍요롭게 살았다. 여기에서 세 신인이 솟아난 곳이 바로 제주시 이도동의 삼성혈이다.

 

 

저 안에 신인이 솟았다는 구멍이 있다.

 


여느 신화가 다 그렇겠지만, 이 역시 당시 권력자가 조상을 신성화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가 분명하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 신화가 애초에는 무당들의 서사무가로 전해지던 탐라국 건국의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일개 세 가문(三姓)의 유교적 제의로 쪼그라들었단 점이다. 이는 유교를 앞세워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조선 정부가 탐라국의 토속세력과 문화를 척결하는 와중에 일부 가문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삼성혈 입구에는 당시 토속세력 척결에 앞장섰던 지방관들의 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혈에서 처음으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게 한 이수동 목사, 당 오백과 절 오백에 불을 질렀다는 이형상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단일민족국가라고 자부하는 우리에게도 힘 있는 자들에게 짓밟힌 변방의 역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부터는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야영한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은 한라산 1300 고지에 있으며 전체 면적이 76만 평에 이른다. 자연휴양림 입구를 지나 차를 타고 숲 속을 한참 동안 달려야 비로소야영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편백 숲으로 둘러싸인 제3야영장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빼곡히 하늘로 솟은 편백과 텅 빈 야영데크가 만난 곳, 가득 차 있지만 비어있는, 마법같은 곳이다.


 

한참 텐트를 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조금 더 아래쪽에 놀이터가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 그쪽으로 텐트를 옮기기로 했다. 짐을 옮기는 게 조금 번거롭지만, 그래도 놀이터가 있는 게 더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텐트, 접었다 다시 치기엔 뭔가 억울한 것 같아 그냥 들어서 옮기기로 했다. 결국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동욱이랑 동호까지 텐트 한쪽씩 잡고 '텐트이동작전'에 돌입했다. 자기들도 뭔가 돕는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영차영차 정말 열심이다. 기특하군. 이번에 제주도 오면서 거실형 텐트를 돔 텐트로 바꿨는데, 잘한 거 같다. 휴대도 간편하고 거창한 느낌도 없고.

 

 

편백 숲 놀이터.

 


어둠이 내리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작은 랜턴 하나 밝혀 숲길로 나섰다. 하늘을 올려다본 동욱이가 "별 참 많다. 별천지다"라고 말하니 동호가 "맞다 맞다", "맞다 맞다"라고 외친다. 애들이 오늘 밤 저 별들 사이에서 신 나게 뛰어노는 꿈을 꾸면 좋겠다. 그날 밤 우리 텐트에는 검정치마의 <International Love Song>이 끊임없이 흘렀다.


I really really wanna be with you
I'm so very lonely without you
I can hardly breathe when you are away
without you I might sleep away all day

 

 

애들이 자면, 우리는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듯 지도를 펼친다.

Posted by alternative
제주유랑가족2012. 8. 20. 21:29

[5월 8일] 달이 머무는 바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그래도 온몸이 쑤신다. 일주일의 긴장과 피곤이 몸에서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다행히 동욱이는 텔레비전 앞에서 만화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문제는 동호, 아빠가 일어나자마자 안아 달라고 착 달라붙는다. 아, 무거운 놈.

 

얼른 아침밥 해 먹고 바닷가로 나갔다. 월정리(月汀里)는 달이 머무는 바다다. 제주도의 크고 이름난 해수욕장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강렬한 존재는 아니지만, 깊고 아늑하며 고요하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 한적한 바람이 한데 모여 눈과 발, 마음을 치유한다.

 

 

 

월정리 바닷가의 화룡점정은 ‘고래가 될 cafe’다. 원래 그 자리에는 '아일랜드 조르바‘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이게 옆 동네 평대리로 자리를 옮기고 ’고래가 될 cafe'가 들어섰다.

 

‘고래가 될 cafe'는 바다로 열린 카페다. 낡은 테이블과 의자들은 카페를 뛰쳐나와 작은 도로를 건너 바로 바다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사랑을 나눈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맘껏 뛰고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자연 속 키즈카페가 바로 여기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법인가 보다. 동욱이는 그림 그려 달라, 동호는 안아 달라, 득달같이 아빠에게 달려든다. 엄마는 예전 직장에서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퇴직했으면 끝이지 왜 아직 업무 전화로 남편을 고통받게 하는지, 고약한 심보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돌아오자 동호는 엄마 품에 안겨 바로 잠이 들었다. 동욱이는 엄마 옆에서 그림을 한두 장 그리더니 이내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모래 놀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귤꽃소복샤르르라떼’를 한 잔 마신다. 달짝지근한 라떼 한 모금에 온 세상이 평온해진다.

 

 

 

 

 

 

오늘 동욱이 모래놀이 주제는 화산이다. 동욱이는 “딩동딩동~ 화산이 열렸다~”라며 연신 노래를 불러대며 모래를 쌓아 높은 산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펑”하고 터트린다. 그렇게 몇 번 터진 화산은 이내 논과 밭으로 변했다. 자신을 미역농부로 소개한 동욱이는 바닷가에 떠내려 온 해초를 모아 모래사장에 심었다. 미역농부의 얼굴을 보니 올해도 풍년이다.

 

 

 

저녁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흑돼지 삼겹살을 사왔다. 제주도에서는 돼지고기를 멜젓(멸치젓)에 찍어 먹는다. 종지에 담아 고기와 함께 석쇠 위에서 보글보글 끓인 멜젓은 느끼한 고기 맛에 감칠맛을 돌게 하며 끝 맛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는 환상의 궁합이다.

 

제주도 토종 흑돼지를 흔히 ‘똥돼지’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마다 변소에 돌담을 쌓아 ‘돗통’을 만들고 그 안에서 돼지를 키웠다. 그러다 관광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톳통’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자연순환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똥을 돼지가 먹고, 그 돼지의 똥을 땅이 먹고 또 그 땅에서 자란 곡식을 인간이 다시 먹는 것이다. 더럽고 냄새난다는 이유로 없애버렸지만, 제주도 ‘돗통’만큼 깨끗하고 친환경적인 시스템이 또 있을까 싶다. 정작 우리가 더럽고 야만적인 시대로 후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때이다.

Posted by alternative
제주유랑가족2012. 7. 9. 17:54

[5월 7일] 오늘 바다는 어제보다 눈부시다


바람 탓에 밤잠을 설쳐 아침부터 찌뿌둥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모래놀이에 열중이다. 애들까지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졸라댔으면 최악의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모래놀이 판을 벌인 곳은 바닷가의 넓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텐트 옆 길가에 쌓인 작은 모래 더미였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은 신발을 벗어 모래의 감촉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놀이에 집중했다. 신발은 모래를 퍼 나르는 포크레인이 되고, 속도를 뽐내는 경주용 자동차가 되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된다. 이 녀석들에겐 주위의 모든 물건이 그저 장난감일 뿐이다.

 

 

스스로 잘 놀고 있으니, 참 고맙다.

 

 

그럼에도 마트에만 가면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를 쓴다. 사촌 형들에게 물려받은 장난감이 방안 가득한데도 말이다. 특히 <파워레인저>에 푹 빠져 있는 동욱이는 유독 <파워레인저> 장난감에 눈독을 들인다. 대부분은 총이나 칼과 같은 전투용 장난감들이다. 쉽게 사 줄 수가 없다. 하지만 구둣주걱으로 정의의 검을 휘두르는 녀석의 진지한 표정을 떠올리면 사정은 달라진다. 녀석이 너무 폭력적인 놀이에 빠져드는 건 아닌지 걱정하다가도 애들의 놀이를 너무 어른의 입장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남자아이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으로 여자아이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또 대체로 여자아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남자아이는 자신의 지배력과 의지를 중요하게 여겨 승부욕이 강하다. 이맘때 남자아이들이 <파워레인저>에 빠져들고 총과 칼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 <우뢰매>를 보면서 지구의 평화를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무조건 부정하고 가로막지 말고 다른 방식으로 아이의 승부욕과 운동에너지를 발산할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양육이다.

 

피곤한 몸은 오후가 돼서야 풀렸다. 동호는 낮잠 자고 엄마랑 동욱이는 바닷가에 물놀이 나갔다. 혼자 텐트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본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아주 좋다. 이것이 진짜 여행이다.

 

오후 2시가 되니 바닷물이 물러나기 시작한다. 지구의 원심력이 달의 인력을 물리치고 바닷물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달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만 하루가 조금 넘는 24시간 50분, 오늘은 어제보다 50분 늦게 물때가 시작된다. 그래서 같은 시간, 같은 바다지만 사실은 늘 다른 바다이다. 햇살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물의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바다의 푸른 빛깔도 다 다르다. 오늘 이 바다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유일한 바다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바다는 어제보다 더 눈부시다.

 

동호가 깨고 우리는 모두 물놀이를 즐겼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엔 더 넓은 백사장이 열렸다. 군데군데 미처 바닷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작은 바다도 생겼다. 작은 물고기들도 많다. 물고기도 쫓고 맘껏 달리기도 하고, 어린 동욱이와 동호가 놀기엔 안성맞춤이다.

 

 

작은 물고기들이 무서운지 처음엔 손을 꼭 잡고 있다.

 

물고기 쫓기에 재미를 붙인 조동욱.

 

동호도 재미있는 표정으로 물고기 쫓기에 나섰다.

물이 빠져나간 곳에 아내와 아이들이 남았다.

 

오후 늦게 텐트를 철수하고 월정리로 이동했다. 월정리는 이곳 김녕성세기해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동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해수욕장이나 관광지가 없어서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유명세가 덜 한 탓에 조용하게 아름다운 바다를 즐길 수 있다. 월정리에서는 민박을 한다. 마침 아는 선배의 소개로 민박을 독채로 저렴하게 얻을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따뜻한 물로 씻고 텔레비전도 보고 방바닥에 등짝도 붙였다. 야영생활도 좋지만 역시 집이 좋은 법이다.

Posted by alternative
제주유랑가족2012. 6. 28. 14:59

 

김녕해변의 새로운 배이스캠프

 

[5월 6일] 오늘 밤은 폭낭이 될 수밖에

 

관음사야영장 5일째, 오늘 베이스캠프를 옮기기로 했다. 애초 우리가 찜을 해둔 야영장은 관음사야영장, 서귀포자연휴양림, 돈내코야영장, 모구리야영장, 이렇게 네 곳이다. 대략 대엿새 주기로 베이스캠프를 옮기고 때때로 민박과 바닷가 야영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김녕성세기해변에서 하루 지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제주시에 사는 아내의 선배 집에 잠깐 들렀다. 서울에 살다가 몇 해 전 제주도로 내려와 정착한 집이다. 제주 이민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거침없이 제주이민>이란 책에 ‘불꽃 아빠 뽀뇨의 프리랜서 일기’란 꼭지로 실리기도 했다. 온 가족이 거지꼴을 하고 찾아가 밥도 얻어먹으랴, 여행정보도 얻으랴, 자세한 사연은 듣지 못했으나 꽤 부러웠다. 아이들 키우면서 언제나 마음 한구석엔 시골로 내려갈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아이들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면서 키우긴 정말 싫다. 그럼에도 섣불리 시골로 내려가지 못하는 건 도시생활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는 독특하게 전세가 거의 없고 ‘년세’란 게 있다. 부동산 매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집은 말 그대로 사는(living) 집이다. 싫든 좋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집이다. 자기 집이 있고 버는 만큼 쓴다. 그래서 남자는 대개 삶이 치열하지 않다. 술 먹고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즐긴다. 윷놀이에 한 판에 천만 원씩 돈이 걸린다. 물론 여자는 다르다. 물질이면 물질, 밭일이면 밭일, 일 년 365일 쉴 날이 없다.

 

김녕성세기해변은 제주시에서 1132번 일주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야 한다. 중간에 ‘조천-함덕 해안도로’로 빠지면 함덕서우봉해변이 나온다. 잘 알려진 해수욕장이지만, 관광지 분위기가 너무 강하다. 마치 태국의 어딘가에 있을 휴양지 같은 느낌이다.

 

반면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김녕성세기해변은 다르다. 에메랄드 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사장, 해안도로를 따라 서 있는 풍력 발전기까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럼에도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고 고요하다. 게다가 바다 바로 옆으로 넓은 잔디밭의 야영장이 있다. 아직 정식으로 개장을 안 해 물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지만, 여유로운 바닷가 야영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천혜의 장소였다.

 

 

김녕바다, 아름답다.

 

바다를 보고 있는 우리 집

 

 

황송하게도 온통 꽃이다.

 

 

텐트 설치하고 바닷가 한번 갔다 오니 금방 해가 저문다. 사람들이 물러난 바닷가의 밤은 바람이 주인이다. 허락 없이 영역을 침범한 우리를 혼내기라도 하듯 밤새 우리 텐트를 흔들어댄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우리 집이 날아가는 건 아닌지, 무서워서 잠을 이룰 수 없다. 이런 상황은 꿈꿨던 야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하여튼 겁은 많아서.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훌륭한 조명이 된다.

 

 

제주도 바람은 무섭고 섬뜩하다. 따뜻한 날씨에도 변화무쌍한 바람으로 사람들의 삶은 척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아직도 바람신인 영등신을 모신다. 음력 2월 초하루에 영등환영제가, 2월 14일에 영등송별제가 열린다. 영등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왔는지, 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등등에 따라 한 해 운세도 달라진다고 한다. 미신일 뿐이지만, 바람으로 하룻밤 고생하니 절로 수긍이 간다.

 

폭낭도 바람이 만들어낸다. 폭낭은 바람을 타는 나무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엎드리는 풀잎처럼 폭낭도 바람으로 방향에 따라 제 몸의 방향을 바꾼다. 자연은 자연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 이 바람을 어쩔 수 없는 나로서도 오늘 밤만큼은 폭낭이 될 수밖에 없다.

 

 

제주도 어디선가 찍어 둔 폭낭


Posted by alternative
제주유랑가족2012. 6. 26. 14:42

 

관음사야영장 우리 집!

 

[5월 5일] ‘라복새’를 아시나요?


숲의 아침은 새소리에서 비롯한다. 어둠에서 흘러나온 시간은 분명 연속적이지만, 아침이 열리는 순간은 어느 변곡점에 이르러야 발생한다. 새소리는 그 변곡점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시작은 한 마리였다. 작은 새가 지저귀는 짧은 외침이었지만, 강렬하고 청명한 울림은 온 세상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이어진 적막과 두 번째 지저귐. 그러자 신기하게도 반대편에서 또 다른 새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듯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어느새 수십 마리의 합창으로 변한다. 모두가 제각각 다른 소리다. 놀랍다. 동욱이는 그중에서도 특히 ‘라복~ 라복~’, 이렇게 우는 새소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빠, 우리 라복새라고 부를까?” 새로운 종의 새가 인류에게 보고되는 순간이다. 그후로도 우리는 종종 독특한 새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지으며 놀곤 했다.

 

관음사야영장은 한라산 관음사코스 입구에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큰 주차장이 보이고 정면에 관리사무소가 보인다. 관리사무소 왼쪽 조그만 길에서 한라산 등산로가 시작한다. 주차장은 넓은 잔디밭으로 연결되는데, 잔디밭 위쪽이 바로 야영장이다. 우리 텐트는 그보다 더 위쪽인 숲 속에 있다. 관음사야영장은 주차장까지만 차가 들어갈 수 있어 손수레를 이용해 짐을 운반해야 한다. 위쪽 숲 속까지 무거운 짐을 옮기려면 힘이 곱절로 들지만, 한적한 야영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럼에도 오늘은 토요일, 야영장이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수많은 야영객은 물론이고 교회 야유회까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우리는 빨리 아침을 해치우고 야영장을 나섰다.

 

 

관음사야영장 잔디밭에서 손잡고 놀고 있는 동욱이와 동호

 

 

오늘은 삼양검은모래해변을 찾았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래사장이 검은 게 이색적이다. 화산석인 현무암 가루 때문이다. 이곳에선 동호가 예사롭지 않다. 검은 모래사장이 신기한가 보다. 장난감 그릇을 하나 들고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래 놀이에 빠져든다. 춤추듯 검은 무늬가 펼쳐진 모래사장과 조동호의 왠지 모를 촌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어제도, 그제도 꼭 그 자리에서 놀았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검은모래해변을 걷고 있는 아내와 동호

 

동호, 왜 촌티가 날까?

 

엉거주춤한 동호, 혼자서도 잘 논다

 

오후에는 목욕탕에 갔다. 시설을 잘 갖춘 야영장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도 있지만, 여긴 그렇지 않다. 공중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매번 애들을 씻겨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사실 동욱이랑 함께 목욕탕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등도 밀어주고 바나나우유도 먹고, 뭐 이런 시시콜콜한 로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도 실현되진 못했다. 안경을 차에 두고 가는 바람에 홀딱 벗고도 선글라스를 낀 채 목욕탕을 누벼야 하는 민망한 장면만 연출했다.

 

동욱이는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무릎에 난 상처도 아물지 않아 뜨거운 탕에 들어가는 게 힘들었을 텐데 아빠 품에 쏙 안겨 잘 버텼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거품에도 한참을 재밌어한다.

 

동욱이랑 목욕탕에 있으니 어렸을 때 아버지와 목욕탕에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뭉뚱그려진 기억의 단편이지만, 내가 또 언제 아버지랑 목욕탕엘 갈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그렇게 동욱이는 종종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아버지가 동욱이를 안고 있었는데, 이 녀석 나를 닮은 게 아니라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싶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이해해주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한 적도 있었지만, 동욱이는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가 동욱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듯이 아버지도 내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이겠지. 그리고 이 녀석도 모르겠지. 아, 너무 늙어버린 아버지 생각에 또 가슴이 먹먹해진다.

 

Posted by alternative